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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못 믿는 중국과 러시아...두 나라는 결코 동맹국이 될 수 없다”

by KBEP 2022. 3. 7.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2.03.05 09:00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21회>

그림 <“화궈펑 주석과 리부주석의 차를 막고 서신을 전달한 게 “현행 반혁명”인가? 두 차례나 불법적으로 현행 반혁명분자로 규정해서 아직도 나를 핍박하는 베이징 공안국을 강렬히 고발한다!“ 베이징 시단 민주장의 대자보. 아직 덩샤오핑이 최고영도자로 추대되기 전인 1978년 추정>

미국서 활동하는 중국인 망명객 웨이정성 “인류 상식에 반하는 중·러 정부”

2022년 2월 22일,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 배치되고, 미국, 영국, 독일이 대(對)러시아 제재를 발표한 직후였다. 그 일촉즉발의 순간, 대한민국의 여당 대권 후보는 “아무 관계도 없는 나라에서 전쟁이 났는데 우리 주가만 떨어진다”는 문제의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바로 그때 25년 째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 중국인 망명 정객(政客)이 “시진핑과 푸틴은 맹우(盟友)인가?”라는 격문을 발표했다. 지금도 해외 중국인들 사이에선 중국의 시진핑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틈타 타이완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그러한 우려에 대해 이 망명 정객은 중국과 러시아는 뿌리 깊은 상호 불신 때문에 절대로 동맹 관계를 체결할 수 없으며, 만의 하나 서로 동맹이 된다 해도 그 관계는 지속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각종 사교(邪敎)의 공동 특징은 인류의 상식, 중국의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천리(天理)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리만 절대 진리라고 맹신한다. 그 교리를 거부하면 하등 인류로 취급을 해서 그런 사람들을 배척하고 속일 때는 어떠한 심리적 부담도 없다···. 중국과 러시아 양국은 어떤 정부인가? 중국은 전제 정권이며, 러시아는 준(準)전제적 위권(威權, 권위주의) 정권이다. 전제와 위권(威權)은 공존할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 같은 산에는 두 마리 호랑이가 있을 수 없다. 이 두 나라는 이웃이 아니다. 싸움만 안 일어나면 다행이다.”

현재 중·러 양국의 정부를 공히 사교 집단이라 단언하는 이 망명 정객의 이름은 웨이징성(魏京生, 1950- ), 1978-1979년 “베이징의 봄” 시단(西單) 민주장(民主墻, 민주의 벽) 운동의 아이콘이다.

1978년 ‘베이징의 봄’ 주역...32년간 정치범 복역 후 미국으로 망명

1979년 3월 체포된 이후 웨이징성은 18년의 세월을 “반혁명” 정치범으로 복역했다. 1993년 잠시 풀려난 웨이징성은 미국의 기자들과 만나 열악한 중국의 인권 상황을 고발했고, 1994년 4월 다시 체포되어 14년 형을 선고받았다. 1997년 웨이징성의 석방을 요구하는 국제 인권단체의 압박과 미국 클린턴(William J. Clinton, 1946- ) 전 대통령의 요청에 못 이겨 장쩌민(江澤民, 1926- ) 총서기는 그의 가석방과 미국행을 허락했다. 1997년 11월 뉴욕에 도착한 웨이징성은 이후 수도 워싱턴으로 옮겨가서 “웨이징성 기금회”를 조직했다. 그후 25년의 세월 동안 그는 중국공산당에 맞서서 “민주장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2021년 9월 미국에서 중국공산당의 코비드 19 정책을 비판하는 웨이징성의 모습. 사진/Alex Wong/komas.com>

“진정 민주(民主)란 무엇인가? 인민이 직접 뽑은 대리인이 인민의 의지에 따라 인민의 이익에 복무해야만 민주라 할 수 있다. 또한 인민은 반드시 수시로 그 대리인을 파면하고 교체할 수 있는 권력을 가져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 대리인이 인민의 이름으로 인민을 기만하고 압제할 수가 없다. 과연 가능한가? 구미(歐美) 각국의 인민이 누리는 민주가 바로 그것이다···. 중국 인민은 ‘위대한 조타수’ ‘역사 상 절대 다시 없을’ 이미 죽어버린 마오쩌둥에 대해서 몇 마디만 해도 감옥에 끌려가서 갖은 수난을 겪어야만 한다. 비교해 보라! 사회주의 ‘민주집중제’와 ‘착취계급’의 민주는 진정 하늘과 땅 차이다!”

1978년 12월 5일, 베이징 도심의 시단 민주장에 붙은 “제5의 현대화: 민주 및 그 외”라는 제목의 대자보에 기재 내용이다. 익명의 수많은 글들과는 달리 이 대자보의 하단엔 저자의 실명이 적혀 있었다. 웨이징성(魏京生), 당시 베이징 동물원의 전기공으로 일하던 29세의 노동자였다.

1964년 이래 중공중앙은 국가발전의 계획으로 농업, 공업, 과학·기술, 국방 분야에서 이른바 “4대 현대화”를 추진해왔다. 덩샤오핑을 위시한 중공중앙의 개혁파가 “개혁개방”의 기치를 흔들던 시점, 웨이징성은 “4대 현대화”에 덧붙여 “제5의 현대화”로 “민주”를 요구했다. 1950-60년대 마오쩌둥 역시 입만 열면 “민주”를 외쳤지만, 웨이징성이 말하는 “민주”는 구체적으로 유럽과 미국에서 실행되는 “선거 민주주의”를 의미했다. 중국도 직접 국민선거를 통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을 “인민의 대리인”으로 선출하자는 파격적인 체제변혁에의 요구였다.

<1978년 베이징 민주장 운동. 사진/공공부문>

이 한 편의 대자보는 1978년 12월 민주장 운동의 성명서가 되었다. “선거로 주석을 새로 뽑자는 대자보가 붙었다면서?” 민주장에 운집한 군중은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길게 뺀 채로,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힘차게 휘갈린 웨이징성의 대자보를 읽고 또 읽었다. 대자보의 내용은 입소문을 타고, 많은 사람의 수첩에 적혀, 문건으로 등사되어 순식간에 들불처럼 베이징의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게 전해졌다. 중국의 인민은 직선제로 인민의 대표를 뽑은 적은 없었지만, 직선제의 의미는 잘 알고 있었다. 웨이징성이 말하듯, “민주”란 본래 쉽고, 자연스럽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제도다. 인민이 직접 선거로 대리인을 뽑고, 무능하거나 부패하면 갈아치우는 것!

순식간에 웨이징성은 광장의 영웅으로 급부상했지만, 바로 이듬 해 봄 그 잔인한 인권유린으로 악명 높은 친청(秦城) 감옥에 갇혀서 18년 긴 세월 동안 영어(囹圄)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었나? 아니, 그보다는 웨이징성 스스로 죽음을 각오하고 그 대자보를 썼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중국의 현실에서 누구든 대자보에 실명을 들어 마오쩌둥을 비판하고, 나아가 선거를 통한 권력 교체를 주장한 자는 결코 무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중국도 인민이 직접 주석을 선출하자” 직선제 권력 교체 주장

1978년 12월 초 직선제 권력교체를 주장한 웨이징성은 누구인가? 그는 1950년 베이징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중국공산당 고급간부였다. 덕분에 그는 유년 시절 소위 “홍색 귀족”의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중난하이(中南海)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의 뒷얘기를 주워들으며 자랐다. 1966년 문혁이 발발했을 때 그는 만 16세였다. “수도 홍위병 연합행동위원회”에 가입한 후, 웨이징성은 “대천련(大串聯)”의 혁명 운동에 동참했다. 기차를 타고 대륙의 남북을 오르내리고, 신장(新彊)의 오지까지 찾아갔다. 그는 직접 비참한 인민의 생활고를 목도한 후, 정부의 선전선동이 모두 거짓임을 깨닫고 절망했다. 이후 그는 홍위병 합창단원이 되었는데, 그 합창단원들이 광저우로 내려간 후 홍콩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 그 모의 사실이 누설되면서 전국에 수배령이 떨어졌다.

웨이징성은 몰래 부친의 고향 안후이(安徽) 진자이(金寨)로 피신했는데, 이미 그곳은 대기근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굶어죽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 참혹한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웨이징성은 울분을 삼킬 수 없었다. 그 모든 책임이 마오쩌둥에 있음은 명백해 보였다. 마오쩌둥이 제창한 “인민민주독재”에서 민주와 독재는 상호 모순된다는 점도 자명해 보였다.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에 대한 배신감으로 치를 떨었지만, 연약한 일개인으로서 문혁의 광풍을 피하는 길은 군입대밖에 없었다. 1969년 군대에 들어가서 4년간 복역을 마친 웨이징성은 1973년 베이징 동물원에 전기공으로 배치되었다. 그후 5년이 지나서 1978년 12월 초, 그는 바로 그 한 장의 대자보로 일약 민주장(民主墻)의 영웅이 되었다. 그 한 장의 대자보에는 한 청년이 깨달은 “자유”와 “민주”의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풋내기 지식인이 앵무새처럼 되뇌는 “외래의 민주”가 아니라 한 전기공이 중국의 현실에서 터득한 “자생의 민주”였다. 이후 그는 뜻이 맞는 민주투사들과 함께 <<탐색>>이라는 시사저널을 창간한 후, 본격적으로 민주화의 길을 닦기 시작했다.

<1995년 베이징 인민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웨이징성의 모습. 사진/AP>

민주 운동 고무했던 덩샤오핑, 탄압으로 선회

베이징 시단의 민주장은 중난하이(中南海) 중공 본부에서 불과 1.7km, 톈안먼 광장에서도 2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시단벽에 붙은 주요 대자보들은 날마다 거의 실시간으로 중공중앙에 보고되고 있었다. 당시 덩샤오핑과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은 화궈펑(華國鋒, 1921-2008) 영도 하의 “보수파”에 맞서 격렬한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덩샤오핑은 스스로 민주를 외치며 “민주장운동”을 고무했지만, 그가 갈수록 확산되는 민주운동을 그대로 방치할 리 없었다.

1979년 3월, 미국을 다녀와서 베트남과의 전쟁을 개시한 후, 덩샤오핑은 마침내 민주장운동을 조준했다. 덩샤오핑은 문혁 시절 주자파(走資派) 수정주의의 영수로 몰렸던 대표적 인물이었다. 4인방은 구속되고 문혁은 끝이 났지만, “수정주의”의 낙인을 벗기 위해서라도 덩샤오핑은 민주운동을 신속하게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3월 16일, 덩샤오핑은 사회주의 기본원칙에 반하는 대자보를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임박한 정치 탄압의 조짐을 감지한 <<탐색>>지 동인들은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1979년 3월 25일, 웨이징성은 “민주냐, 새로운 독재냐”란 제목의 대자보를 다시 써서 민주장에 붙였다.

“사람들은 덩샤오핑이 독재자로 변했음을 알아야만 한다. 1975년 덩샤오핑이 정계 복귀했을 때 그는 인민의 이익을 중시하는 듯했다. 그때 인민 대중은 열렬히 그의 정책을 지지하고, 피로써 그를 지지하려 했다······. 이제 그는 민주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인민의 민주운동을 진압하려 한다. 성(省) 정부가 반민주적 정책을 취하도록 묵인하고, 독재를 행하고 있다. 그는 더 이상 인민의 신뢰와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인민의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를 침해하는 자는 인민의 적이다!”

민주운동을 탄압하는 덩샤오핑을 독재자로, 나아가 인민의 권리를 짓밟는 인민의 적이라 선언하는 강력한 규탄의 성명서였다. 격분한 덩샤오핑은 신속하게 민주장운동을 짓밟았다. 나흘 후인 3월 29일 웨이징성은 공안국에 체포되었고, 이후 며칠에 걸쳐 민주장 운동의 주역들이 연달아 구속되었다. 중공중앙의 기관지 <<홍기(紅旗)>>는 “인권의 구호는 부르주아의 슬로건”이라는 사설이 실렸다. 4월 5일자 인민일보는 “사회주의 기본원칙”을 벗어나면 반혁명이라는 메시지가 실렸다.

 

<1979년 1월 1일자 미국 “타임Time”지의 표지 모델로 선정된 덩샤오핑.>

1979년 3월 30일, 덩샤오핑은 신속하게 민주장 운동을 진압하고 이른바 “4항 기본원칙”을 공표했다.

1) 사회주의 기본노선을 반드시 견지한다.

2) 무산계급독재를 반드시 견지한다.

3) 중국공산당의 영도력을 반드시 견지한다.

4)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반드시 견지한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는 군중의 민주장운동과 더불어 시작했지만, 불과 석 달만에 강경한 사회주의 노선으로 회귀했다. 그 결과는 “개혁개방”과 “마오쩌둥 사상”의 기묘한 결합이었다. 그해 가을 10월 16일, 웨이징성은 베이징 인민법정에서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79년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저항을 이어가던 민주세력도 일단 지하로 숨을 수밖에 없었는데 ······. <계속>

 

<웨이징성의 옥중 서신 및 시론집, “혼자 맞서는 용기,” 1998년 미국 펜귄 출판사 출판>

출처 : 조선일보

기사원문 :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2/03/05/2I6YGITDGBHFTDRDDJNIGH5RTI/?utm_source=kakaotalk&utm_medium=shareM&utm_campaign=M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