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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에 젤렌스키만한 정치인이 있나

KBEP 2022. 3. 4. 08:58

중앙일보

입력 2022.03.03 00:30

안혜리 기자중앙일보 논설위원 

2013년 우크라이나 유로마이단 시위를 다룬 '윈터 온 파이어'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흡사 내전을 방불케 하며 장장 93일간 이어졌던 2013년 11월 우크라이나 키이우(키예프) 유로마이단(유럽 광장) 시위를 다룬 다큐멘터리 '윈터 온 파이어:우크라이나의 자유 투쟁'(2015)을 뒤늦게 봤다. 경찰 특공대(베르쿠트)와 티투쉬키(범죄자 출신 용병부대)로도 모자라 자기 국민을 향해 저격수까지 배치한 친(親) 러시아 야누코비치 정권의 폭력적 진압에 맞서 죽음을 불사한 저항에 나선 우크라이나 사람들 모습에 그저 눈물이 났다. 독립(1991년)한 지 불과 20여 년 된 신생독립국가로서 정치 불안과 외세 위협에 시달리는 우크라이나 모습이 대한민국의 건국, 그리고 뒤이은 전쟁의 상처 등과 겹쳐지면서 감정이입이 된 모양이다. 저 멀리 어느 동유럽 국가가 아니라 우리의 과거와 마주한 느낌이랄까.

다큐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고 유럽연합(EU)과의 무역 협정을 무기 연기한 야누코비치 대통령에 반대하는 평화 시위가 유혈이 낭자한 참극으로 번진 후에도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계속 광장으로 모여든다. 당시 시위대는 이렇게 증언한다.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조국을 위해 계속 싸웠어요. " "나무 방패만 들고 포화 속으로 뛰어들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용감한지 몰랐죠. 죽을지 모른다고 만류하면, 죽으러 왔다고 대답했어요. 더 나은 조국을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빗발치는 총탄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었죠. " 그야말로 남녀노소, 종교를 초월한 애국심의 현장이었다. 우리가 그 시절 그랬던 것처럼.

무려 125명의 사망자와 65명의 실종자라는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낸 유혈 시위에 이들이 도망치지 않고 거꾸로 광장에 모인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자유, 그리고 아이들. 다시 말해 자유와 미래였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렵지 않아요. 자유는 우리의 몫이자 권리입니다. 우크라이나는 자유 세계의 일원이 될 겁니다.  노예가 될 일은 절대 없고 자유를 만끽할 겁니다. "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죽을 각오를 했습니다. 자식이 없는 사람들조차 말이죠."

2013년 겨울 이런 마음으로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이 러시아의 무자비한 침공을 받은 지금, 같은 마음으로 총을 들고 있다. 그때 그랬던 것처럼 당장 눈앞의 내 안위나 이익을 위해 적당히 타협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두려움을 떨치고 스스로 전장에 뛰어들고 있다. 가깝게는 2013년 유로마이단, 더 멀게는 2004년 오렌지 혁명의 정신을 이은 것이지만 현직 대통령의 리더십이 변곡점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지난달 17일 최전선을 찾아 군 장병을 격려하고 있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우크라니아 대통령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의 암살조 투입이 알려진 후에도 미국의 탈출 제안을 거부하고 우크라이나에 남아 군복을 입은 채 병사를 독려하며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또 유럽 의회 화상 연설에서 "우리 아이들이 살아있는 것을 보고 싶다.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감동적인 연설로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결과 지지율 90%가 넘는 자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는 물론이고 전 유럽 수호의 상징 인물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젤렌스키를 향해 유독 대한민국 집권세력만은 냉담을 넘어 조롱까지 서슴지 않으니 기가 막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부터 이 정부 전·현직 법무부 장관 등 소위 진보 진영 유력인사들은 전쟁 발발 직후부터 코미디언 출신이라는 이유로 침략당한 젤렌스키 대통령을 비하했다. 정작 전 세계의 평화를 걷어차고 자국인을 클래식 공연에서부터 축구 경기, 심지어 수학 올림픽에 이르기까지 각종 세계 무대에서 지워버린 러시아 푸틴에 대해선 침묵하면서 말이다. 야당 역시 국제적 망신을 산 여당 인사들의 말꼬리를 잡는 데만 급급해 실망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여야를 막론하고 과연 젤렌스키처럼 암살 위협에도 불구하고 탈출 제안을 거절하고 가족과 함께 조국에 남아 끝까지 싸울 정치인이나 국가 지도자가 몇이나 될까. 닥치기 전엔 물론 알 수 없지만 과거 행적으로 볼 때 안타깝게도 국민 대다수는 아마 별 기대를 하지 않을 거 같다. 실리나 국익이라는 거창한 레토릭을 내세워 책임을 회피하는 어정쩡한 태도로 결국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들 생각하지 않을까.

대선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중요한 순간순간마다 눈앞의 이익 대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선택을 할 정치인이 누구인지 고심해서 투표해야겠다. 과거 우리가 겪은 것과 비슷한 비극을 다시는 겪어서는 안 되겠지만, 혹시라도 먼 훗날 우리 아이들이 어떤 곤경에 처했을 때 용기를 갖고 맞서 싸우며 세계의 도움을 끌어낼 수 있기를 바라기에.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중앙일보 논설위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입니다.

ahn.hai-ri@joongang.co.kr

출처 : 중앙일보

기사원문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52518#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