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ditor. 채지형
- 입력 2023.11.30 08:10
향기는 직접 가지 않으면 맡을 수 없다. TV가 아닌, 두 발로 현장을 가야 하는 이유를 다시 깨우쳐 준 이번 여행. 다음에 불가리아로 떠난다면, 분명 이 장미 향 때문일 것이다.
●장미의 나라에서
불가리아는 ‘장미의 나라’다. 국화부터 장미다. 불가리아산 장미 오일은 고급 향수의 원료로 사용되는데, 세계 최고 품질을 자랑한다. 프랑스, 이탈리아의 유명 브랜드 장미 향수에는 대부분 불가리아산 장미 오일이 들어있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멀리 가지 말고, 여행 가방만 열어봐도 알 수 있다. 장미 향 신경 안정 오일, 장미 모양 볼펜, 장미 따는 아가씨 마그네틱 등 온통 장미 관련 기념품이 불가리아 여행 가방을 가득 채웠다.
●한 송이에서 뿜어내는 강렬한 향
불가리아 여행에서 가장 강렬했던 순간은 장미 향을 맡은 때였다. 서울에서 이스탄불을 거쳐 소피아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부터 일어나 장미농장에 도착한 시간까지 장장 2박 3일. 장미에 코를 가까이 대자, 긴 시간을 모두 보상받는 듯했다. 단 한 송이에서 뿜어내는 향이 이렇게나 강할 줄이야. 화려한 프릴이 달린 드레스를 입은 공주님 같다고나 할까. 발랄하면서 깊이 있고, 진하면서 상큼한, 이해하기 힘든 여러 향이 콧속으로 밀려왔다.
장미농장에 간다고 했을 때, 기대감이 없진 않았지만 다른 여행보다 크진 않았다. 이미 순천만 국제 정원를 비롯해 서울 중랑천, 용인 에버랜드 등 전국 곳곳을 돌며 형형색색의 장미를 구경한 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피아 호텔 앞 화단의 장미를 본 후 기대감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혹시나 향이 날까 싶어 코를 댔는데, 진한 향이 훅 들어왔던 것. 경험상 기억하고 있던 은은한 장미 향하고는 질감부터 달랐다.
●향을 잃기 전, 새벽과 아침
소피아의 교통체증을 뚫고 달려, 파나규리슈테(Panagurishte) 지역의 작은 농장에 도착했다. 어여쁜 분홍색 장미들이 여행자를 환영했다. 유기농으로 장미를 재배하는 농장이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가족 경영으로, 알차게 운영되는 곳이었다.
장미가 들어간 수많은 제품의 기본은 장미 오일이다. 장미 오일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장미를 채취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1년 중 장미를 따는 시기도 정해져 있다. 5~6월, 약 25일 정도로 길지 않다. 게다가 밤새 내린 이슬을 머금고 있을 때 장미를 부지런히 따야 한다. 해가 뜨면 햇빛에 향기가 증발하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늦어도 10시 전에는 따야 향기를 머금은 장미를 채취할 수 있다.
장미농장에 도착하니 보성 녹차밭에서 소쿠리를 들고 찻잎을 따는 이들처럼, 사람들이 장미를 한 송이씩 따고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으니, 꽃바구니를 하나씩 나눠 주며 장미 채취하는 요령을 알려 줬다. 손가락 사이에 장미꽃을 끼고 검지로 받힌 후 엄지로 ‘톡’하고 밀면, 쉽다고 했다.
●특별한 분홍 장미 ‘로자 다마세나’
장미를 따기 전에 향을 먼저 맡았다. 눈이 번쩍 떠졌다. “세상에나, 이 작은 꽃송이에서 이렇게나 진한 향이 나온다고!” 말없이 조용하던 동행들이 갑자기 수다스러워졌다. 왜 불가리아 장미를 최고로 치는지 알겠다는 반응부터 싱그럽다, 고급스럽다, 진하다, 그윽하다 등 찬사가 이어졌다. 장미 향에 빠져 계속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더니, 함께 온 동행인 피터가 등을 톡톡 쳤다. 그리곤 “장미는 언제 딸 거야?”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바구니를 들었다. 장미를 한 송이 딸 때마다 손가락이 향으로 물드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해 본 일 중 가장 향기로운 체험이었다고나 할까. 분홍색 장미가 꽃바구니에 차곡차곡 쌓였다. 장미를 따다 보니 궁금증이 생겼다. 장미의 대표색인 빨간 장미가 아닌 분홍색 장미만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로자 다마세나(Rosa Damascena)’라는 품종의 분홍 장미에서만 장미 오일을 추출할 수 있는 게 이유였다. 세계적으로 7,000여 종의 품종이 있지만, 향기를 추출할 수 있는 장미는 극히 일부였다.
‘다마세나’라는 이름의 유래도 흥미로웠다. 멀리 알렉산더 대왕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페르시아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를 통해 불가리아로 들어온 장미라, 이름이 다마세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고 했다.
●1g의 장미 오일을 얻기까지
놀라운 것은 장미꽃 3~40kg을 모으면 겨우 장미 오일 1g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장미 오일 1g은 상상 이상의 노동력이 필요로 했다. 장미 오일이 너무 비싸다고 했던 투정이 무색해졌다. 수많은 이들의 손길로 직접 장미를 채취하는 일부터 고도의 증류 기술을 통해 장미유를 추출하기까지, 쉽지 않은 단계들이 필요했다. 그제야 순금 1g과 장미유 1g 가치를 비슷하게 여긴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장미 따기 체험은 잊지 못할 여행을 만들어 줬다. 짙고 깊은 장미 향, 그리고 귀한 것은 결코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EU 오가닉 마크를 확인하세요”
불가리아 유기농 생산자 협회(BOPA) 알베나 시메오노바(Albena Simeonova) 회장
장미농장을 안내한 BOPA 알베나 시메노바 회장은 “이제는 ‘오가닉’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며 불가리아의 유기농 농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불가리아에서도 살충제를 비롯해 땅에 해가 되는 약을 쓰지 않고 힘들게 풀을 뽑아 가며 농장을 유지하는 유기농 농장들이 늘어나고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지구와 환경, 착한 먹거리를 고민하는 철학을 가진 농부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 이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만든 단체가 불가리아 유기농 생산자 협회(Bulgarian Organic Producers Association, BOPA)이다. 깊은 산속에서 야생 꿀을 채취하는 양봉업자, 유기농 요구르트를 만드는 축산업자, 싱싱한 채소를 기르는 농부, 직접 기른 포도로 와인을 만드는 와인 메이커 등 수백여 업체와 농부가 가입되어 있다.
협회에서는 EU와 손잡고, 믿을만한 유기농 업체에 인증서를 발급하고 제품에 라벨을 붙여 준다. 알베나 회장은 “불가리아산 유기농 제품의 우수성은 인정받고 있으나 인지도는 부족한 편”이라며, “한국에서도 EU 오가닉 마크를 단 불가리아 제품을 자주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돌아보자, 소피아 한 바퀴
댕댕 종을 울리며 시내 한복판을 달리는 트램, 도시를 포근하게 안고 있는 비토샤산, 꽃을 사는 다정한 사람들. 소피아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고대 그리스어로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 불가리아의 수도이자 문화 유산이 산재해 있는 이 도시에서, 꼭 돌아봐야 할 필수 코스를 소개한다.
성 알렉산더 네프스키 대성당
St. Alexander Nevsky Cathedral
소피아에서 꼭 가 봐야 할 곳으로, 러시아 오스만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을 위해 세운 정교회 성당이다. 네오비잔틴 양식의 건물로, 5,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웅장하다. 대형 돔은 러시아에서 기증한 금으로 꾸며진 것으로, 보는 방향에 따라 모습이 달라 한 바퀴 돌면서 돌아보는 게 좋다.
내부도 꼭 봐야 한다. 러시아, 불가리아, 구 체코슬로바키아 화가들이 그린 벽화와 화려한 샹들리에는 감탄사를 불러일으킨다. 분위기도 성스러워,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게 된다. 이용 요금은 무료지만, 사진 촬영을 원할 때는 10레바(한화 약 7,300원)를 내야 한다. 주말에는 근처 공원에서 성화와 골동품 등 아기자기한 빈티지 제품을 판매하는 벼룩시장이 열린다.
소피아 여신상
Statue of Sofia
지혜의 여신 소피아를 상징하는 동상으로, 소피아의 랜드마크다. 검은 드레스가 휘날리는 모습이 역동적이다. 왼팔 위에 앉은 올빼미는 지혜를, 오른팔로 쥐고 있는 화관은 명성을 의미한다. 이전에는 레닌 동상이 있던 자리로, 2001년 공산주의 종말 후 세워졌다.
성 페트카 교회
Sveta Pekta Church
소피아 여신상이 바라보는 쪽으로 광장이 있는데, 광장 아래 지붕만 보이는 교회가 있다. 자그마한 교회지만, 암흑기의 정교회를 보여 준다. 오스만 제국이 지배할 당시 박해를 피해 지하에 교회를 지었던 것. 지붕은 땅과 맞닿아 있다. 11세기 불가리아 성인에서 이름을 따 왔다.
성 니콜라스 교회
Russian Church
소피아 시내 산책의 대부분은 교회를 찾아다니는 여정이다. 성 니콜라스 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이색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진한 초록색 지붕에 앙증맞은 황금 돔, 곳곳의 금박 장식이 독특하다.
반야 바시 모스크
Banya Bashi Mosque
오스만 제국 시절 1576년에 세워진 이슬람 사원으로, 당시 유명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이 설계했다. 지름 15m의 대형 돔과 미나렛(이슬람교 사원의 외곽에 설치하는 첨탑)을 볼 수 있으며, 현재까지 이슬람 공동체에 의해 모스크로 사용되고 있다. 이 모스크의 특징은 온천 위에 지어졌다는 것. 지금도 모스크 근처 땅을 살펴보면 수증기가 오르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모스크 옆 온천
불가리아는 온천으로도 유명하다. 시내 한복판에 온천수가 나오는 온천이 있다. 모스크 옆에 있는 노란색 건축물이 있는데, 과거 공중 온천탕으로 쓰이던 곳이다. 근처에 수도꼭지가 여럿 설치되어 있어, 온천수를 맛볼 수 있다. 불가리아 사람들은 이 온천수에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따뜻한 온천수가 콸콸 흘러나오니 주의해야 한다. 텀블러를 챙겨 가면 편리하다.
근위대 교대식
대통령 궁 앞에서 1시간 30분마다 근위병 교대식이 열린다. 씩씩하게 걷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간다. 시간이 안 맞을 때는 근처 분수대에서 기다리면 된다. 시원하게 올라오는 분수가 청량하다.
▶Travel Info
AIRLINE
불가리아 소피아까지 직항은 없다. 튀르키예 이스탄불이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보통 경유한다. 인천에서 이스탄불까지 11시간 15분 소요, 이스탄불에서 소피아까지는 2시간 45분 걸린다.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할 경우,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11시간 45분, 프랑크푸르트에서 소피아까지 2시간 15분 소요된다.
VISA
90일 무비자.
TIME GAP
불가리아가 한국보다 6시간 느리다.
CURRENCY
화폐 단위는 레브(BGN, лв)로, 1레브는 약 731원이다(2023년 9월 현재). 물가는 우리나라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WEATHER
10월은 서늘한 날씨에 비성수기로, 여행하기 좋다. 불가리아 역시 6~8월이 성수기이며 햇볕은 강하지만 습도는 낮다.
LANGUAGE
불가리아어를 사용하며, 문자로는 키릴문자를 쓴다. 알파벳과 헷갈리기 쉽기 때문에, 기본적인 키릴문자는 익히고 가는 게 편하다.
RELIGION
불가리아 정교 83%, 이슬람교 12%.
FOOD
요구르트는 불가리아 사람들의 국민 음료다. 마트에 가면 다양한 종류의 요구르트를 볼 수 있다. 식탁에서 빠지지 않는 음식은 숍스카(Shopska) 샐러드다. 신선한 토마토와 오이, 양파를 큼지막하게 썰고 그 위에 올리브유와 페타 치즈를 올리면 끝이다. 으깬 감자와 간 고기를 오븐에 구운 무사카(Moussaka), 고기와 감자, 피망, 토마토를 섞은 철판 요리인 사츠(Sach)도 흔하게 먹는다.
SHOPPING
불가리아 여행 기념품을 사고 싶다면, 세르디카 역 근처에 많다. 이곳에서 불가리아 특산품인 장미 제품을 비롯해 다양한 기념품을 찾을 수 있다. 일반 상점은 소피아의 중심인 비토샤(Vitosha) 거리에 밀집해 있다.
TIP
고개를 옆으로 흔들면 ‘예’, 위아래로 흔들면 ‘아니오’라는 뜻. 우리와는 반대니, 의사 표현할 때 주의하자. 길거리에 예쁜 벽화가 많다는 점도 특징이다. 각양각색의 벽화를 찾아다니는 여정도 흥미롭다.
글 채지형 사진 조성중 에디터 곽서희 기자 취재협조 EU ORGANIC
출처 : 트래비 매거진(https://www.travie.com)
기사원문 : https://www.travie.com/news/articleView.html?idxno=5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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