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 류원혜 기자
- 2022.03.18
외과의사 이국종(53) 교수가 소말리아 해적에 피랍됐다가 총상을 입은 선장을 살리기 위해 대여비 4억4000만원 에어 앰뷸런스 보증을 섰던 이유를 밝혔다.
지난 17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2011년 1월 소말리아 인근의 아덴만 해상에서 해적에게 피랍된 삼호주얼리호 선원 21명을 대한민국 해군 청해부대가 모두 구출했던 '아덴만 여명작전'이 다뤄졌다.
당시 삼호주얼리호에서는 석해균 선장이, 해군에서는 김규환 대위가 활약했다. 이후 이국종 교수의 책임감이 더해져 피랍 6일, 작전 5시간 만에 선원과 선박을 모두 안전하게 구출할 수 있었다.
해적들은 우리 해군의 작전이 시작되자 흥분해 석해균 선장에게 총 6발을 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석해균 선장을 발견한 김규환 대위는 선장을 먼저 이송하고 남은 해적을 소탕하기로 했다. 지체하면 선장의 목숨이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저항한 해적은 모두 사살, 투항한 5명은 생포했다.
석해균 선장은 가까운 오만 병원으로 이송됐고, 이국종 교수가 파견됐다. 그러나 2차 수술까지 마쳤음에도 석해균 선장의 지혈이 되지 않자 그는 선장을 한국으로 이송하기로 결정했다.
이국종 교수는 당시 선장의 상태에 대해 "몸에서 이미 괴사가 일어나 벽돌처럼 딱딱해지고 부푼 상황이었다. 관통 손상을 입어 내장에서 오염물이 배출되면 몸이 썩어 들어간다"며 "팔다리 4개 중에 3개도 겨우 붙어 있었다. 가망 없는 상황이라 마지막으로 승부를 걸어보자 했다"고 설명했다.
석해균 선장을 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서는 에어 앰뷸런스가 필요했다. 대여비만 4억4000만원이라 국가기관에서 보증을 해야 빌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외교부의 승인은 쉽지 않았다. 결국 이국종 교수는 "내 이름으로라도 빌리겠다"며 자신의 이름을 걸고 보증을 섰다. 그는 "모르겠다.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며 "왔으니까 무조건 해결해야 하고 석해균 선장이 잘못되면 나도 끝이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이국종 교수는 "저는 목숨을 걸었던 건 아니지만, 당시 작전에 투입됐던 대원들은 목숨을 걸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리에서 일한다"며 "한국 사회가 버티는 가장 큰 힘은 자기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사람들 덕분"이라고 말해 감동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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