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선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4/03/11 [09:00]
1943년에 국왕 보리스 3세는 히틀러와 회담한 뒤 급사했고 이후 6세의 왕태자 시메온이 왕위를 승계했다.
결국 불가리아는 항복한 이후 연합국으로 전향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소련군과 동맹을 맺은 불가리아는 독일군이 발칸반도에서 탈출하는 것을 봉쇄했다.
불가리아 군은 오스트리아로 진격했고 이후 비엔나 전투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결국 불가리아는 초창기에 독일의 편에 섰다하여 패전국으로 전락되었고 그와 함께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이에 공산당에서 투표를 통해 1946년 9월 9일에 왕정이 폐지되었고 시메온은 이집트로 망명했다.
이후 그의 섭정인 키릴 왕자와 섭정단, 그리고 의회의원들도 총살하여 숙청했다.
이후 은거한 페르디난트 1세가 아직 살아있었지만 그는 독일에 머물러 있었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시 1946년에 벌어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에서 불가리아 공산당 소속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Георги Димитров, 1882~1949)가 주석으로 선출되어 소피아에 돌아오게 되었다.
디미트로프는 1882년 6월 18일 불가리아 공국 시기에 코바체브치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코바체브치(Kovačević)는 현재 세르비아의 영토이고 당시에는 불가리아의 영토였다.
그는 불가리아계 모친과 세르비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세르비아계 불가리아인이었지만 10세에 소피아로 들어와 학창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워낙 가난한 삶을 살았던 탓에 학교를 그만두고 인쇄식자공으로 취직하여 노동자로 종사했다.
이후 그는 소피아에서 노동조합 운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공산주의 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고 1902년에 불가리아 사회민주당에 참여하게 된다. 이후 이 세력들은 불가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을 형성하게 되면서 급진적인 공산주의자들로 성장한다. 불가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은 1919년에 코민테른에 가입했고 불가리아 공산당으로 승화했다.
디미트로프는 1904년부터 1923년까지 불가리아 노동조합연맹의 서기장을 지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에 불가리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공산당은 불가리아에 정식적인 정당으로 등록되었다.
디미트로프는 1917년에 체포될 때까지 불가리아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및 새로운 전쟁 공채 발행에 반대하면서 당의 조직을 키우기 시작했다.
1923년 6월, 알렉산데르 스탐볼리스키(Александър Стамболийски) 총리가 쿠데타로 인해 체포되어 살해당했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반(反) 터키 조직인 알렉산데르 찬코프(Александър Цанков) 총리에 반대하는 봉기를 조직하게 되었으며 디미트로프는 혁명 활동가로서 탄압에 맞선 저항을 지도하게 된다.
저항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디미트로프와 지도부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망명했으며 이후 유고슬라비아에서 체포되어 궐석재판의 판결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유고슬라비아 내 같은 공산당들이 체포된 불가리아 공산당들을 구출하기 위해 폭동을 일으켰고 디미트로프는 탈옥하여 여러 가지 가명을 만들어 쓰며 유럽 전역을 떠돌게 된다.
그는 1929년까지 소련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독일로 다시 이주했고, 그곳에서 나치에 맞서 독일 공산당이 이끄는 반(反) 파시즘 인민전선을 조직하는 활동을 하게 된다. 1933년 독일 국회의사당에서 방화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독일을 여행 중이였던 불가리아 공산당 소속의 바실 타네프, 블라고이 포포프,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를 방화사건의 공범으로 몰려 베를린에서 체포되었다.
그리고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디미트로프는 당시 나치에게 이미 넘어간 법원과 검찰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신념을 밝히는 한편 이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했으며 결국 독일 공산당을 해산시키려고 사건을 조작한 나치 당국은 디미트로프와 다른 공산주의자들을 무죄로 방면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주범으로 체포되었던 마리뉘스 판데르뤼버(Marinus van der Lubbe)만 유죄선고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현대 독일의 공식 입장은 '정신이상자의 단순 방화를 나치가 정치적으로 악용했다'로 나타내고 있다. 이후 디미트로프는 1935년 8월 2일 코민테른 7차 대회에 참가해 파시즘의 공세와 파시즘에 반대하여 노동자 계급의 통일을 지향하는 투쟁은 코민테른의 임무라면서 파시즘에 맞서는 인민전선을 조직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이에 대해 반(反) 파시즘 통일전선론이 코민테른에 정식적으로 채택되면서 본격적으로 반(反) 파시즘 투쟁을 위한 인민전선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디미트로프의 인민전선론은 함께 7차 코민테른에 참여한 스페인의 공산주의자인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깊이 감화를 받아 스페인 내전 당시 본격적으로 활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프랑스, 미국, 인도, 영국 등지에서도 반(反) 파시즘 통일전선이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디미트로프는 고국인 불가리아로 귀국하여 인민전선의 일종인 불가리아 조국전선을 조직하여 대조국 전쟁 당시 소련군에 참전해 나치를 불가리아에서 몰아내는데 일조하게 된다. 1944년 소련군의 반격이 계속 성공하여 불가리아로 돌아온 디미트로프는 1946년 인민 공화국을 수립함과 동시에 코민테른에서 공산정권의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1944년 조국전선 쿠데타로 총리가 된 키몬 게오르기에프 스토야노프(Кимон Георгиев Стоянов)를 부주석 겸 외무장관으로 임명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불가리아 공산정권이 수립되었다. 부주석인 키몬 게오르기에프의 1923년 쿠데타를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1934년에도 즈베노 쿠데타를 일으켜 총리가 되었었던 바 있다. 이어 1944년의 조국전선 쿠데타가 그의 마지막 쿠데타로 기록되었으며 디미트로프를 적극 보좌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디미트로프는 여전히 소련 시민권자였다.
게다가 1946년에 디미트로프는 스탈린의 압력으로 인해 마케도니아를 합병하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디미트로프는 그와 같은 스탈린의 강요에 반발하여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티토에게 접근하여 발칸 사회주의 연맹 창설 프로젝트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소련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외교정책을 시작했다. 1947년 티토와 디미트로프는 유고슬라비아의 니쉬에서 만나 긴밀한 협력을 요구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디미트로프 자신이 줄곧 주장했던 소비에트에 관련한 이념 논쟁에서 티토와 의견이 맞았지만 1948년 스탈린과 티토가 완전히 틀어진 이후 최악의 관계가 되었다. 같은 해에 디미트로프는 루마니아를 방문하여 발칸 사회주의 연맹에 참여하라며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지도자들을 설득하고자 대중 연설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동구권 전체의 통제를 원했던 스탈린의 뜻에 방해가 되었다. 거기에다 티토와 스탈린의 이견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가입 협상과 마케도니아의 할양을 방해하는 셈이 되었다.
디미트로프는 평소에 간 질환을 달고 살아왔던 인물이었다. 1949년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에 참가차 소련을 방문했고 모스크바의 병원에서 간 질환을 치료받던 도중 갑자기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사망했다. 그의 사후 후임 서기장으로는 발코 벨료프 체르벤코프(Вълко Вельов Червенков)가 임명되었고 총리로는 조국전선의 일원이었던 바실 페트로프 콜라로프(Васил Петров Коларов)가 임명되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방사능 치료를 받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독살당했는지의 여부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스탈린의 진노를 샀었고 티토와 가까이 지냈던 관계로 스탈린에 의한 독살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의 시신은 오랜 기간 동안 엠버밍(Embalming) 처리되어 부검을 실시할 수도 있었지만 부검하기 전에 불가리아가 민주회 되었고 그때 시신이 화장되었기 때문에 디미트로프의 사망은 공산권 국가의 10대 미스테리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공산권 국가 시절 그는 초대 주석이었기에 그에 대한 우상화를 위해 엠버밍(Embalming) 된 시신은 소피아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박물관에 조성된 영묘에 안장되었다.
이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박물관의 영묘는 6일 만에 완공되었지만 민주화가 된 이후 유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화장되었다. 그러나 영묘를 처리하는 문제로 인해 갖은 9년 동안 논쟁이 있었다. 불가리아의 역사 중 하나인 공산당의 유산이고 이를 상징하는 건물이었기 때문에 빠르게 철거하려 했지만 그래도 6일 만에 완공된 건물치고는 당시 소피아를 대표하는 건물이었기 때문에 철거 대신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재활용하자는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여론조사의 결과 소피아 시민의 3분의 2는 철거를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민주화로 세워진 정부는 영묘 철거를 강행했고 1999년 철거되었다. 이 영묘가 매우 견고하게 지어졌기에 철거할 당시 4번의 폭파 시도 끝에 비로소 해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필자/ 정길선.
노바토포스 회원,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칼럼니스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유라시아 고고인류학연구소 연구교수.
출처 : 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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