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부채한도 6월까지 올려야
지난달 19일, 미국 정부 부채가 의회가 정해놓은 한도(31조3810억달러)를 꽉 채웠다. 오는 6월까지 한도를 늘리지 못하면 미국은 각종 보험 혜택이 끊기고, 채무불이행(디폴트)에 빠질 수도 있다. 정부는 부채 한도를 올리기를 원하지만,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은 오히려 정부 지출을 삭감하겠다고 반대하고 있다. 그러자 경제학자 등 일부 전문가가 공화당 협조 없이도 독자적으로 부채 한도 문제를 피할 수 있는 여러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다. 우리 돈 1305조원에 해당하는 1조달러짜리 백금(platinum) 동전을 만드는 방안도 그중 하나다.
이런 주장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0년대 들어 국가 부채를 둘러싸고 민주당과 공화당이 대립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한다. 다소 황당해 보이는 1조달러짜리 동전 발행은 진짜 가능한 것일까.
◇단골로 등장하는 1조달러 동전
미국은 1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1939년 부채 한도 제도를 도입했다. 당시 한도는 450억달러 정도였다. 이후 한도는 꾸준히 올랐다. 1997년 이후 부채 한도가 상향 조정된 것만 22차례에 이른다. 정부가 거둬들인 세금(세입)보다 지출이 많은 재정적자가 반복됐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조정된 시점은 2021년 12월로, 의회는 이전(28조9000억달러)보다 약 2조5000억달러 오른 31조3810억달러로 정했다.
그런데 부채 한도를 올리는 일은 순탄치 않을 때가 많다. 2013년과 2018년엔 여야 간 협상이 길어지면서 연방정부가 잠시 폐쇄되기도 했다. 1조달러 동전 아이디어는 이처럼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종종 등장한다. 특히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일 때 민주당 안팎에서 이런 주장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 2013년 오바마 행정부와 공화당이 부채 한도를 놓고 충돌했을 때도 백악관 웹사이트에 1조달러짜리 백금 동전을 발행하자는 청원이 올라왔다. 당시 발의자는 “극단적인 조치로 보일 수 있지만, 미국과 세계 경제가 더는 터무니없는 정쟁으로 위태로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천명이 서명한 이 청원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도 “공화당이 미국을 채무불이행 상황으로 몰아넣으려고 한다면 오바마 대통령은 1조달러짜리 동전을 찍어내야 한다”고 가세했다.
이 제안은 물론 실현되지 않았지만, 훗날 오바마 대통령은 “당시 잭 루 당시 재무장관과 1조달러 동전 발행을 논의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으며 “내게 거대한 액수의 주화를 발행할 권한이 있고, 이를 통해 국채를 상환할 수 있다는 얘기였는데 다소 이상한 아이디어였다”고 회상했다.
코로나19가 발발한 2020년에도 이 제안이 재등장했다. 당시 러시다 털리브 민주당 소속 연방 하원의원은 코로나 지원법을 제안하며 “액면가 1조달러짜리 동전 두 개를 제작해 연준에 예치한 다음 그 재원으로 전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자”고 했다.
◇주류 학자들은 “현실성 없다” 일축
얼핏 황당해 보이는 이 아이디어를 미국 대통령마저 고려하는 것은 미국의 화폐·금융과 관련된 법 때문이다. 미국은 중앙은행이 지폐를, 재무부가 동전을 발행할 권한을 갖는다. 이 가운데 동전은 금이나 은, 구리로 발행할 경우 액면가가 1달러, 5달러, 10달러, 25달러, 50달러 등으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백금으로 제작되는 동전은 “모든 액면가로 주조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백금으로 각종 기념주화를 발행하면서 다양한 액면가가 가능토록 하겠다는 취지다. 그렇다 보니 이론적으로는 액면가 1조달러, 1000조달러짜리 백금 동전도 주조가 가능하다. 이 규정을 활용해 1조달러짜리 동전을 만들어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 계좌에 예치하면 부채 한도에 얽매이지 않고 재정을 운용할 수 있다는 게 찬성파의 주장이다.
액면가를 크게 높여 동전을 발행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여럿 있지만, 결과는 늘 좋지 못했다. 조선 말기인 1866년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재건 공사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기존 화폐였던 상평통보보다 명목가치가 100배 높은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했다. 당백전 발행 1~2년 만에 쌀과 곡식 가격이 6배나 폭등해 백성의 원망을 샀다. 독일도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연합국에 낼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1조마르크짜리 동전을 만들었다. 화폐를 만들 종이가 부족할 정도로 돈을 찍다 보니 2년 남짓한 기간에 물가는 10억배가량 상승했고, 이는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의 나치당이 집권하는 빌미가 됐다.
1조달러 동전 아이디어는 이른바 ‘현대통화이론(MMT)’과도 맞닿아 있다. 화폐를 발행하려면 세금을 걷거나 국채를 발행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주류 경제학과 달리 현대통화이론은 독자적인 화폐를 가진 국가의 정부는 돈을 무제한으로 찍어도 된다는 주장이다. 대규모 양적완화에도 장기간 저물가가 유지되자 잠시 주목받았지만, 지난해 이후 물가가 급등하면서 이제는 거의 설 자리를 잃었다.
대부분 전문가들은 1조달러 동전에 부정적이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도 ‘속임수(gimmick)’라며 수차례 반대 의사를 밝혔다. 그는 2021년 CNBC에 “연준(중앙은행)에 돈을 인쇄하도록 요청하는 것과 같다. 연준의 독립성을 손상시키는 일”이라고 했고, 올해 들어서도 “연준이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양임석 교수는 “재무부가 1조달러 동전을 만들어도 연준이 이 동전을 받지 않으면 쓸모없는 백금 덩어리에 불과하다”며 “연준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는 얘기”라고 말했다. CNN은 “진지한 경제학자치고 1조달러 동전이 국가 채무불이행을 막기 위한 유효한 수단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미 의회조사국(CRS)도 “의회의 권위와 미국 달러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킬 것”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미국이 진짜로 채무불이행에 내몰릴 상황이라면 고려해봄직하다는 의견을 내는 사람도 있다. 도널드 매런 전 브루킹스 조세정책센터 디렉터는 “1조달러 동전은 품위가 없어 보일 수 있지만, 디폴트가 진짜 발생한다면 정당화될 수 있다”며 “1조달러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낮은 액면가의 동전을 내놓는 것도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출처 : 조선일보
기사원문 : https://www.chosun.com/economy/weeklybiz/2023/02/23/G4RU2WG6XZHTRBXGTIBS3W6PV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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