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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文化/샘터

니체 vs 19세기 유럽 개화기의 여성 작곡가

KBEP 2022. 5. 6. 06:36

하광용의 인문교양 기행 / 하광용 에세이스트

뉴스버스12022. 3. 14. 10:33
 

고교 시절 제가 최고의 은사님으로 손꼽는 분을 대학 입학 후 3월 집으로 찾아뵈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이신 그분은 우리에게 여타 선생님들이 그러했듯 이름보다는 별명으로 많이 불리셨습니다. 바이킹이셨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별명의 유래가 가물가물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유래 따위는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선생님들의 별명이라는 것이 매해 새로 작명되는 것이 아닌 그 학교의 선배 대로부터 대대로 전수되어 따라 내려오니까요. 그래서 한번 바이킹은 영원히 바이킹입니다.

선생님은 왜소한 체격에 책을 매우 가까이하신지라 안팎으로 바이킹을 떠올리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매서운 눈매는 바이킹 전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예리하셨습니다. 그 눈매만큼이나 예리한 언행을 보여주신 선생님의 대학 때 전공은 독문학이었지만 학교에서 우리를 가르친 담당 과목은 영어였습니다. 제가 방문드린 그날 바이킹 선생님은 갓 졸업생이 된 저에게 교실에선 들을 수 없었던 독어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꼭지를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남자의 행복은 Ich will, 여자의 행복은 Er will"

"남자의 행복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고, 여자의 행복은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인 페르시아의 현자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독일 작가인 니체가 남녀의 행복에 대해 한 말입니다. 바이킹 선생님은 저 문장을 원어로 먼저 말씀해주셨는데 제가 이 기기로는 독일어 알파벳 위 점 두 개인 움라우트 표기법을 몰라 부득이 한글로 병행 표기했습니다. 행복이라는 단어에 움라우트가 들어있습니다.

뭉크가 그린 니체의 초상화 / 니체, Friedrich W Nietzsche, 1844~1900
 

영어로는 "남자의 행복은 I will, 여자의 행복은 He will" 정도로 쓰이겠지만 사실 국어든 영어든 이렇게 그대로 옮긴 번역이 원작자의 원어가 갖고 있는 의미를 완벽하게 따라가기는 힘들 것입니다. 우리말로 쓴다면 "Ich will"이든 "Er will"이든 이 두 단어를 풀기 위해 A4 용지를 구구절절이 채워도 안 될 것이라고 당시 바이킹 선생님은 말씀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작가가 사용하는 오리지널 언어의 힘이고, 언어마다 뉘앙스의 차이가 있기에 그런 것이겠지요. 그래서 역사에 등장하는 탁월한 인문학 천재들은 고전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 라틴어를 독학해서 원전을 읽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도 그 느낌은 올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때 남자의 행복은 별 이견이 없지만 여자의 행복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여자의 경우 배우자인 그가 소망하는 것을 이루는 것만이 행복이라면, 그 안에 여자의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행복은 없다는 것과 같기에 그렇습니다. 그녀의 그가 행복해야 나인 그녀도 행복하고, 그가 불행하면 그녀인 나도 불행하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마치 유교가 지배하던 우리 이조시대 여인의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연상하게 하는 니체의 글입니다. 그럼 결혼하지 않았거나 남친이 없는 여자의 행복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이었을까요? 니체의 말대로라면 무조건 불행해야 하는 것이었을까요?

최근 저는 이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저의 독서 위시 리스트엔 백만 년 전부터 올라 있었고 책을 사놓은지도 오래되었지만 최근에야 제대로 책장이 넘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의 고교 은사인 바이킹 선생님께서 제게 들려주신 위의 이야기는 본문 중 '짜라투스트라의 설교 1부'의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에 대하여' 편에 나오네요. 지금 논의되는 말들은 다 젊은 여자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참고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니체 지음 / 사순옥 옮김 / 홍신문화사 출판)

그 안엔 여성이라면 읽기 힘든 심한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여자는 남자의 장난감이며, 마음의 깊이가 얕고, 잘 변하며, 여자에 있어서 남자의 목적은 임신이라고 하니까요. 그래서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며, 남자는 여자를 찾아갈 때 채찍이나 회초리를 잊지 말라며 이것은 진리라고까지 말합니다. 물론 19세기 만의 진리겠지요. 당시 바이킹 선생님은 남자의 행복 부분만을 강조해서 제자인 제게 덕담으로 이르셨을 것입니다. "Boy!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이 행복이란다"라고 말입니다.

아, 여자의 행복까지 저보고 책임지란 것이었을까요? 설마 여자 만날 때 채찍 들고 가란 것까지 실천하라고 말씀 주신 것은 아니었겠지요.

제가 지난 주에 쓴 <19세기 유럽 개화기의 여성 작곡가>의 속편 성격인 이 글에 니체를 끌어들인 것은 그가 19세기를 대표하는 유럽의 지성남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가장 개방적이고 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 그의 말이 굳어진 글을 통해 실제로 당시의 여성관을 확인하고파서입니다. 그는 1844년에 태어나서 1900년에 사망했으니 19세기를 에누리 없이 알뜰하게 끝까지 살았습니다. 그런데 말년 11년을 바이마르의 정신병원에서 보냈으니 그 기간은 그의 일생에서 어떻게 카운트돼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또 하나 니체는 가히 음악가라 할 정도로 음악에 정통한 작곡가요, 피아노 연주자였습니다.

각종 장르의 곡을 무려 70여 곡이나 작곡하였으며 피아노는 정신병원에서 죽을 때까지 달고 살았습니다.

오죽하면 그가 병동에서  피아노를 칠 때엔 제 정신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을 정도로 그는 피아노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전에 이 글 아래에 등장하는 4인의 19세기 여성 작곡가들을 알거나 친교하고 지냈을 것입니다.

피아노 삼매경에 빠진 니체

물론 니체는 천재이고 철학자이니 위와 같은 그의 여성에 대한 서술 중에 범부인 제가 이해 못 하는 많은 비유와 상징이 들어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역작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평생의 연인인 루 살로메에게 차이자마자 득달 같이 채 한 달도 안 걸린 시간에 쓴 책이라 여성에 대한 그의 적대적인 반감이 배가되어 표출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19세기의 조르주 상드에 이어 20세기까지 화려한 남성 편력을 이어간 루 살로메의 요청으로 친구인 레와 함께 셋이서 기묘한 3인 동거를 했던 니체였습니다.

그렇게 그녀에게 절절맸음에도 괜히 센 척하려고 그의 작품에선 여성을 그렇게 비하하며 표현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여성을 논한 이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에 대하여' 편에서 그나마 딱 한 줄, 남자를 여자보다 열등하게 얘기한 것에서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니체 왈 “남자는 여자보다 더 아이 같다”고 했으니까요.

그리고 이어서 “여자는 그런 아이를 남자보다 잘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아이 같다는 것에는 순진무구와 유치찬란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아, 니체의 이 말은 21세기를 사는 남자인 저도 격하게 공감을 합니다.

사실 니체에겐 안 됐지만 인류는 그를 칼같이 두 번이나 차 버린 루 살로메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녀가 니체에게 실연을 안겨줬기에 이 위대한 작품이 세상에 나왔으니까요.

고대 이후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짜라투스트라의 말문이 그녀 덕에 터진 것입니다.

말놀이 중인 3인 동거 커플, 정작 채찍은 여자인 살로메가 들고 있음

이렇게 여성이 차별받았던 19세기였음에도 음악 분야에서 위대한 결과물을 만들어낸 여성 작곡가들은 그 자체로 매우 위대하다 할 것입니다. 여성의 이름으로 활동을 하기 힘든 시대였으니까요. 특히 작곡은 연주와는 달리 남성만이 존재하는 금단의 영역이었습니다. 문학이나 예술처럼 연구와 고민이 녹아야 결과물이 나오는 학문적이고 지적인 영역은 여성에겐 허용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그것을 이겨낸 그녀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그녀들의 온전한 이름으로 연주되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음악이 아니더라도 과거 그녀들의 희생과 저항을 기초로 사회 각 분야에서 키 플레이어로 활동을 하고 있는 많은 뛰어난 여성들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전편에 얼굴만 빼꼼 등장했던 19세기 유럽 개화기를 빛낸 4명의 여성 작곡가들을 소개합니다. 그래야 이 프로젝트 글이 마무리될 듯합니다. 글 주제에 부합되게 남성이라는 기득권에 맞서 싸운 부분만 부각해서 간략하게 정리합니다. 음악인이 아닌 저인지라 그녀들의 음악적 비평은 제게 불가한 영역이기도 합니다.

루이즈 파렝, Louise Farrenc / 프랑스 / 1804~1875

루이즈 파렝 하면 파리음악원이 항상 따라다닙니다.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녀는 그곳에서 피아노를 공부하고, 또 성인이 되어서도 그곳에 또 가 공부를 계속해 결국 1842년 그 음악원의 교수까지 되었으니까요.

그녀를 비음악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곳에서의 임금 투쟁이었습니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실력과 재능에 비해 낮은 임금을 받았던 그녀는 지속적으로 음악적 실력으로 데몬스트레이션하여 결국 음악원의 남성 교수들과 동등한 임금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죽기 3년 전까지 그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쳐 파리의 음악과 파리음악원을 빛나게 하였습니다.

 

루이즈 파렝의 음악적 성공의 후원자는 그녀의 남편인 파리의 유명 플루티스트인 아리스티드였습니다.

부인의 피아노 연주 재능을 안타까워했던 그는 여성 홀로 연주회를 여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19세기에 그와의 협연 형태로 신혼여행 때부터 공연 여행을 함께 다녔습니다. 그리고 함께 파리에서 음악만 전문으로 다루는 파렝 출판사를 차려 음악 비즈니스에서도 성공한 여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녀는 피아노 솔로곡과 실내악은 물론 서곡과 교향곡 등 대곡도 거뜬히 작곡하여 슈만과 베를리오즈의 찬사를 이끌어 냈습니다. 이렇게 연주와 작곡, 교육과 사업 등 생전에 많은 명성을 얻은 그녀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여성 작곡가들의 곡, 특히 대곡은 남성 비평가들의 경시에 의해 연주되기 힘든 시대였습니다. 어딘가에 잠자고 있을지도 모를 그녀의 오페라가 아직 발견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 Piano Quintet in c minor Op.40

파니 멘델스존, Fanny Mendelssohn / 독일 / 1805~1847

음악만큼이나 그림에도 뛰어나 음악의 화가로도 불리는 멘델스존에겐 그만큼이나 음악에 뛰어났던 누나가 있었는데 그녀는 당시 프로이센의 궁정 화가였던 빌헬름과 결혼하였습니다. 파니를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멘델스존은 펠릭스라 불려야 합니다. 동생인 펠릭스가 자기보다 누나인 파니가 더 뛰어나다고 했을 정도로 위대한 여자 멘델스존이었으니까요. 동생 펠릭스는 남편 빌헬름과 함께 그녀의 평생 후원자였습니다.

4년 터울의 멘델스존 남매는 어린 시절 함께 음악을 공부했고 같은 해에 죽었을 정도로 기묘하게 사이가 좋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누나가 죽고 6개월 후 동생도 죽었는데 병명은 둘 다 같은 뇌졸중이었습니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누나 파니가 작곡한 곡이 당시 여성의 작곡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여건상 본인의 작품으로 세상에 내놓기도 했습니다. 1827년 발표한 <Twelve Songs>가 그것인데 그중 절반인 6곡이 파니의 곡이었습니다.

동생 멘델스존과는 달리 아버지 멘델스존은 파니에겐 19세기의 장벽이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음악적 길을 열어주기 위해 딸의 음악을 희생하게 하였습니다. 같은 선생에게 피아노를 배우며 자라게 했지만 15살부터는 배우는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아들 펠릭스는 음악적 소양을 강화하기 위해 인문학을 배우게 했지만 딸 파니는 좋은 주부가 되기 위한 살림에 필요한 것을 배우게 했습니다. 하지만 파니는 결혼 후에도 강한 음악적 열정으로 살롱 음악회를 통해 연주 활동을 이어갔고 작곡도 계속 병행하였습니다. 

그녀는 평생 500여 곡을 작곡했는데 피아노 소품이 주종을 이루고 그 이외에 가곡, 실내악곡, 오라트리오, 칸타타 등이 있습니다. 그중 현대에 들어와서 멘델스존의 곡으로 알려진 곡 중에서 파니의 것으로 밝혀지는 곡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같은 멘델스존인 데다 유독 같은 성향을 보인 남매인지라 향후 파니 멘델스존의 곡이 더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 Fantasie in g minor for Cello and Piano

클라라 슈만, Clara Schumann / 독일 / 1819~1896

파니 멘델스존에게 가족으로 동생 멘델스존이 있었다면 클라라에겐 남편 슈만이 있었습니다. 둘 다 동시대에 유명 음악인을 가족으로 둔 덕에 이 두 여인은 항상 그들의 이름에 가려져 있습니다. 우리도 헷갈리지 않기 위해 다른 음악가들과는 달리 그들 4인은 성과 이름을 다 따로 외어야 합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래도 동생이든 남편이든 그들 남자가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그들의 유명세로 그녀들의 이름이 후대에라도 이렇게 빛을 보고 있을 것입니다. 19세기 당대에 활동했던 여성 음악가 중 오늘날까지 못 오고 중간에 끊어진 여성 음악가들도 꽤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파니의 동생 멘델스존과는 달리 남편 슈만은 부인인 클라라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였습니다. 일단 지나치게 먼저 죽은 것부터가 그랬습니다. 1856년 로버트 슈만이 죽은 후 클라라는 40년 동안 홀로 과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슈만이 남긴 7남매의 생계를 클라라가 책임져야 했습니다. 사실 그녀는 남편 로버트에겐 평강 공주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결혼 당시 그녀는 19세기 당시로는 드물게 전업 여성 피아노 연주자로 커다란 명성을 얻고 있었는데 반하여 슈만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클라라 집에서는 법정까지 갈 정도로 반대했던 결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움을 극복하고 클라라와 결혼함으로써 남편 슈만의 명성도 커졌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 곡 연주를 통해서도 슈만은 작곡가로서 더욱 유명해졌을 것입니다.

그녀는 유명 피아니스트답게 작곡가로도 많은 피아노곡을 남겼는데 그 곡들은 슈만 생존 시 남편과의 공동 작업물로 발표되었습니다. 여성의 작곡이 허용되지 않던 시대라 비평가들이 어느 곡이 클라라의 것인지 모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슈만이 죽음으로써 생긴 음악적 손실은 그녀가 그런 작곡을 중지했다는 것입니다. 생계를 돌보느라 그럴 여유까지는 없었는지 그녀는 그때부터 작곡은 끊고 연주 활동만 매진하게 됩니다. 그녀가 평생 한 연주회가 1300여 회나 된다니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19세기엔 여성의 전업 연주가 거의 불가했던 점을 고려하면 그녀의 연주가 그 이상으로 뛰어났기에 이런 기록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슈만이 죽은 후 그녀에겐 14세 연하의 한 남자가 나타납니다. 아니 죽기 전부터 그들 부부와 가깝게 지냈던 브람스라는 청년입니다. 클라라는 그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고 평생 친구로만 그를 대했습니다. 요즈음 말로 남사친으로만 지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브람스는 평생 그녀를 연모하며 독신으로 살다가 그녀가 죽고 1년 후에 그도 죽었습니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녀의 사랑을 기다렸다가 바로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긴 수염이 멋진 남자 브람스의 사랑을 웬만하면 클라라가 좀 받아주지 하는 마음이 듭니다. 둘 다 외로운 홀몸이었으니 말입니다.  

- Piano Trio in g minor Op.17

폴린 비아르도, Pauline Viardot / 프랑스 / 1821~1910

19세기 여성 작곡가로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뮤지션입니다. 당시 여성 작곡가들이 연주자로는 대부분 피아니스트였는데 반하여 그녀는 그보다는 오페라의 소프라노 가수로 주로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성악적 재능은 성악가인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음악 집안답게 여렸을 때부터 피아노와 작곡 교육까지 받은 그녀였기에 그녀는 음악가로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녀는 수백 편의 곡을 작곡하였는데 리스트는 그녀를 가리켜 '최초의 천재 여류 작곡가'라고 칭송을 하였습니다. 그런 그녀였기에 쇼팽은 그의 작품 <마주르카>의 편곡을 그녀에게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성악가로서 그녀는 구노, 브람스, 슈만, 생상스 등 당대의 유명 작곡가들이 그녀를 위해 곡을 써서 줄 정도로 뛰어난 프리마돈나였습니다.

폴린 비아르도에겐 두 명의 남자가 있었습니다. 한 명은 역시 프랑스에서 잘 나갔던 친구 조르주 상드가 소개해준 남편 루이 비아르도입니다. 남편인 그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부인인 폴린 비아르도가 공연 시 계약서에 그의 이름으로 서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19세기의 프랑스는 기혼 여성의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 권리가 있는 남편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녀에게 또 한 명의 남자는 운명의 남자라고밖에 할 수 없는 러시아의 문호 투르게네프입니다. 아니, 투르게네프에게 폴린 비아르도가 운명의 여자였습니다. 그는 184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빌리아의 이발사>에 출연한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평생 그녀만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그녀가 기혼녀인 것을 알면서도 그는 노골적으로 그녀에게 접근해 서슴없이 애정 표현을 하였습니다. 이상하게도 폴린의 남편인 루이도 그런 젊은 투르게네프를 묵인하며 그들의 결혼 생활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갔습니다. 마치 루 살로메와 니체의 3인 동거를 연상하게 하는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투르게네프는 이렇게 40년이나 폴린 비아르도를 연모하며 독신으로 살았는데 그녀보다 먼저 죽은 그는 그의 유산을 모두 그녀에게 남겼습니다. 그의 소설보다도 더 소설 같은 프리마돈나를 향한 참으로 기이한 그의 사랑이었습니다.

- 6 Morceaux for Violin and Piano


※ 위의 <19세기 유럽 개화기의 여성 작곡가> 4인의 음악을 직접 듣고 싶으신 분들은 3월 19일 오후 5시,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푸르지오아트홀에서 동명의 타이틀로 무대에서 연주되는 그녀들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위의 글 그녀들 밑에 명기한 곡명은 그날 '프렌즈오브뮤직'의 연주자들이 연주할 곡입니다.
(문의 : 조인클래식, 02-525-6162)

하광용은 대학 졸업 후 오리콤, 이노션 등에서 광고인 한 길로만 가다가 50세가 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사 이때 저때, 이곳 저곳, 이것 저것, 이사람 저사람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이 많다. 박학다식한 사람은 깊이가 약하다는 편견에 저항한다. 그래서 그는 르네상스적 인간을 존경하고 지향한다. 박학과 광고는 어찌보면 ‘넓다’라는 측면에서 동일성을 지닌다. 최근 ‘지명에서 이순으로의 기행’이라는 인문교양 에세이집을 출간한 그는 태평양인문학교실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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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스버스

기사원문 : https://newsverse1.tistory.com/m/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