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가 올 들어 휘청거리고 있다. 엔화 약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가운데 원자재 수입 가격 급등으로 경상수지가 1980년 오일쇼크 이후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일본은 작년 GDP(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256%로 G7(주요 7국) 가운데 재정 상태가 최악이지만 수십년간 경상수지 흑자를 발판 삼아 엔화 가치를 지켜왔다. 그러나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서면 일본 경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엔저 현상이 가속화할 수 있다. 빠른 금리 인상을 예고한 미국과 달리 일본이 여전히 ‘제로(0) 금리’를 고수하고 있는 것도 엔화 가치 하락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42년 만에 경상수지 적자 유력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올해 환율이 달러당 116엔, 원유 가격이 배럴당 105달러일 경우 2022회계연도(올해 4월부터 내년 3월)에 경상수지 적자가 8조6000억엔(약 85조원)을 기록할 것이라는 자체 시뮬레이션 결과를 9일 보도했다. 일본이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한 것은 2차 오일쇼크 후폭풍에 시달린 1980년이 마지막이다.
42년 만에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할 수 있다는 경고는 현실화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10일 1달러당 엔화 환율은 124.3엔으로 니혼게이자이의 전망치를 넘었기 때문이다. 두바이유 가격이 8일 배럴당 98.26달러로 낮은 상태지만 3월 초 120달러까지 오른 적이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다. 현재로선 우크라이나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지금과 비슷한 대외 여건이 상당 기간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니혼게이자이는 달러당 환율이 120엔, 원유 가격이 배럴당 130달러일 경우에는 일본 경상수지 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3%에 해당하는 16조엔(약 158조원)까지 급증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일본은 원유와 천연가스를 모두 수입에 의존한다. 이런 상황에서 유가(油價)가 오르고 엔화가치가 떨어지면 해외에 지급해야 할 비용이 늘어나 경상수지가 악화된다. 이미 일본은 지난 1월 1조1887억엔(약 11조7600억원)의 적자를 봤다. 2월에는 1조6483억엔(약 16조3000억원)의 흑자로 돌아서긴 했지만 흑자 규모는 1년 전보다 42.5%나 줄었다. 일본 언론들은 “경상수지가 2월 흑자로 돌아선 건 계절적 요인에 불과하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미국으로부터 국채 이자를 받는 달이고, 중국이 춘절(春節·설) 연휴에 수입을 단기간 늘렸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1분기 주요 25국 중 엔화 하락 폭 둘째로 커
일본의 경상수지 적자 폭이 커지면 엔화 가치가 더 떨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1분기에 5.7% 하락했다. 1분기에 주요 25국 화폐 가운데 엔화 하락 폭은 러시아 루블화에 이어 둘째였다. 위기 시 엔화 가치가 오른다는 ‘엔화=안전자산’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지 않고 있다.
엔화 가치는 3월 말 한때 달러당 125엔까지 밀린 적도 있었다. 2015년 달러당 125엔이 됐을 때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더 이상 엔저는 없을 것”이라고 말해 달러당 125엔이 이른바 ‘구로다 라인’이라고 불렸는데, 7년 만에 다시 구로다 라인에 닿을 정도로 엔화 가치가 떨어진 것이다. 엔화 가치 하락에 따라 100엔당 원화 환율도 이달 들어 980원대로 떨어졌다.
과거에는 엔저가 두드러질 때마다 수출이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로 주가가 오르곤 했지만 올해는 다르다. 엔화 약세에도 불구하고 닛케이지수는 이달 들어 3% 하락했다. 미즈호은행은 “도요타를 중심으로 주력 기업 생산 시설이 대거 해외로 이전해서 과거와 같은 엔저의 유리한 점은 활용하기 어렵게 됐고, 엔저로 일본 국민의 구매력이 저하돼 경기를 냉각시킬 수 있다는 불리한 점은 뚜렷해졌다”고 분석했다. 이지평 한국외국어대 특임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원유와 원자재를 구입하기 위한 달러 수요가 전세계적으로 증가하자 연초 일본에서 배당을 받은 외국인들이 일본 내 재투자를 하지 않고 투자금을 빼가며 엔저를 부채질했다”고 말했다.
세계 주요국이 인플레이션으로 고통을 받고 있지만 장기 저성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일본은 여전히 0%대 물가 상승률을 보이고 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일본이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해 금리를 올릴 경우 막대한 국채 이자 부담이 커져 재정이 더 나빠지기 때문에 진퇴양난의 상황”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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