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전쟁이 불붙인 脫세계화 흐름
“세계화의 만조(滿潮)는 이미 지났다. 이제 남은 건 물이 얼마나 많이 빠지느냐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며 글로벌 기업 수백 곳이 러시아에서 철수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영국 가디언은 이렇게 평했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이던 1990년 미국 맥도널드의 모스크바 입점이 세계화 시대의 도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었다면, 맥도널드의 러시아 시장 철수는 거대하고 급격한 탈(脫)세계화(Deglobalization) 흐름을 상징한다.
개방된 경제와 자유로운 교역, 다국적 기업으로 대표되는 세계화 패러다임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부터 이미 쇠퇴 중이었다. 서방국가에선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와 트럼프주의(미국 우선주의)로 대변되는 보호무역주의 기조가 고개를 들었고, 미·중 간 무역 분쟁은 패권 경쟁으로 번졌으며 신종 코로나 팬데믹(대유행)이 터지면서 세계경제를 이어주던 글로벌 공급망(GVC)까지 마비됐다.
이런 와중에 터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탈세계화와 신(新)냉전, 세계경제의 블록화를 가속화할 전망이다.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의 개리 허프바우어 연구원은 CNBC에 “세계화의 반전 징후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에게 우크라이나 침공은 의미심장하다”며 “지금이 (탈세계화의) 전환점일 수 있다”고 했다.
브렉시트·트럼프 보호무역·美中 무역분쟁·공급망 마비...유라시아와 중국 경제 공동체 움직임脫세계화 본격화 되면 제2요소수 사태 동시다발 터질 수도
◇경제제재가 부른 탈세계화
세계화 전문가이자 전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인 제프리 프랭클 하버드대 석좌교수는 “탈세계화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부터 시작됐다”고 말한다. 실제 세계은행이 집계하는 세계 GDP(국내총생산)에서 상품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글로벌 금융 위기가 발발한 2008년(51%)을 정점으로 내림세를 타기 시작해 2020년 기준 42%까지 떨어졌다.
금융 위기 이후 탈세계화가 본격화된 원인은 위기 전염 차단과 지정학적 갈등으로 국제 자본 흐름에 대한 각종 규제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지난달 24일 낸 보고서에서 “세계화 쇠퇴 추세는 경제제재 증가 흐름과 일치한다”며 주요 사례로 2012년 이란 핵 제재, 2014년 크림반도 침공 제재, 2018년 미국 대선 개입에 대한 러시아 제재, 미·중 간 무역 전쟁에 따른 관세 부과 등을 들었다.
한 국가의 제재는 상대국의 보복 제재를 불러오기 마련이고, 자본 흐름과 교역이 끊기면 자급자족 방식의 보호주의 정책이 득세한다. 가령 미국의 경제제재에 노출된 러시아는 이미 지난 2014년 미국 등 서방국가 중심으로 운영되는 국제금융결제전산망(SWIFT)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독자적인 결제망인 러시아금융통신시스템(SPFS)을 구축했고, 2018년 제재 이후에는 830억달러(약 100조4700억원) 규모의 미국 국채를 매각해 금(金)과 달러로 대체했다.
◇인터넷마저 쪼개진다
정부의 각종 제재는 세계화의 상징인 인터넷마저 쪼개고 있다. 이른바 ‘스플린터넷’의 등장이다. 파편을 뜻하는 스플린터(splinter)와 인터넷의 합성어로, 어디서든 접속할 수 있던 인터넷이 국가의 간섭으로 분열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원래는 중국이 인터넷 검열을 위해 만든 ‘만리 방화벽(Great Firewall)’을 비판하는 용어였으나, 이제는 구글과 메타(페이스북 모기업), 트위터 같은 미국 빅테크 기업에도 공공연하게 적용된다.
가령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 의회 등의 요청에 따라 주요 빅테크 기업들은 러시아 뉴스 서비스를 차단하고 광고를 금지했으며 지도 서비스마저 중단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에 맞서 미국 소셜미디어 기업에 대한 트래픽 속도를 떨어뜨리고 접속을 제한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터넷이 스플린터넷으로 분열되는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탈세계화 흐름이 가속화되면 글로벌 경제가 냉전 시대와 같은 경제 블록으로 회귀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지난 16일 러시아 관영 매체 스푸트니크 일본지사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회원국들이 중국과 함께 단일 통화 도입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라고 보도했다. 서방이 주도하는 현재의 글로벌 경제 시스템을 벗어나 독자적인 경제 공동체를 추진한다는 의미다.
같은 날 중국은 국제사법재판소(ICJ)가 내린 러시아의 군사 작전 즉각 중단 결정에도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냈다. 스타니슬라브 마커스 사우스 캐롤라이나대 교수는 “지정학적 재편과 중·러 반(反)서방 파트너십의 초기 징후는 기업들이 새로운 냉전 블록 출현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경고했다.
◇무역 비중 높은 한국에 큰 부담
21세기 초 ‘골디락스 시대’의 기반이 됐던 세계화의 퇴조는 막대한 비용을 수반한다. 그중 하나가 인플레이션이다. 재화와 서비스의 자유로운 흐름이 막히면 거래 비용이 증가해 가격이 오른다. 일부 국가들이 특정 상품이나 자원을 무기화할 경우 가격 상승 압력은 더욱 강해진다. 이미 러시아 제재 이후 국제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넘나들고 있고, 구리와 니켈 같은 주요 원자재 가격 역시 사상 최고치를 경신 중이다.
여기에 경기 침체까지 맞물리면 자본주의 체제 최대 적이라 여겨지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도래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가 최근 1조달러 이상 자산을 운용하는 펀드매니저 34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2%는 가장 큰 우려로 스태그플레이션을 꼽았다. 한 달 전 응답률(30%)의 두 배 이상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세계경제에 미치는 여파가 그만큼 크다고 본 것이다.
탈세계화 흐름은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는 특히 큰 부담이다. 조상현 한국무역협회 국제통상무역원장은 “우리나라는 자원 부족을 넘어 아예 없는 나라로 교역이 무너지면 경제 자체가 돌아가지 않는다”며 “탈세계화 흐름이 거세지면 작년 요소수 대란 같은 사태가 다양한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질 수 있다”고 했다.
출처 : 조선일보
기사원문 : https://www.chosun.com/economy/mint/2022/03/24/YLXM75R7BJFP3KCO2MSKQBZYKA/?utm_source=kakaotalk&utm_medium=shareM&utm_campaign=M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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