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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과 전투하듯 지은 ‘힐튼’… 철거된다니 마음 아파”

KBEP 2021. 12. 12. 09:15

[아무튼, 주말-김미리 기자의 1미리] 1970~90년대 서울 풍경 바꾼 주역
힐튼 호텔 설계한 원로 건축가 김종성

입력 2021.12.11 03:00
건축가 김종성이 40여 년 전 자신이 설계한 밀레니엄 힐튼 서울을 배경으로 섰다. 영하의 날씨 속 남산에서 칼바람이 매섭게 불어왔지만 동그란 뿔테 안경, 롱 코트 차림의 건축가는 한 치 흐트러짐이 없었다. ‘건축계의 신사’다웠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1977년 미국 일리노이 공대 건축학과 사무실. 마흔두 살 한국인 교수 김종성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속 주인공은 대우실업 시카고 지사장이었다. “교수님, 조만간 김우중 사장이 시카고에 올 건데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얼마 뒤, 김종성은 대우 시카고 지사 사무실에서 패기 넘치는 한 살 아래 사업가 김우중과 마주 앉았다. 두꺼운 뿔테 안경 뒤 예리한 눈빛을 감춘 김우중이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대우센터(현 서울스퀘어) 인접한 부지에 호텔을 하나 지으려고 합니다. 외국에서 공부한 유능한 건축가를 모시고 싶어 친히 뵙자고 했습니다. 세계적 호텔을 지어주십시오.” 김우중은 첫 만남에서 경기고 선배인 김종성을 ‘형님’이라 불렀다. 몇 달 뒤 한국에서 대우 계열사 직원 두 명이 일리노이주 에번스턴에 있던 김종성의 집으로 왔다. 셋은 지하실에 제도 테이블을 놓고 함께 도면을 그렸다. 1983년 서울 남산 자락에 들어선 서울 힐튼 호텔(현 밀레니엄 힐튼 서울)의 시작이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건물이지요. 호텔을 한 번도 설계한 적 없는, 미국에서 대학교수 하던 사람이 호텔 설계를 덜컥 맡았으니. 결국 교수직도 관뒀고….”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김종성(86)이 서울 남대문로 힐튼 호텔 앞에 서서 말했다. 남산에서 칼바람이 불어왔지만 동그란 뿔테 안경, 롱 코트 차림의 건축가는 한 치 흐트러짐이 없었다. ‘건축계의 신사’다웠다.

그의 분신 같은 힐튼 호텔이 철거 위기에 처했다. 지난 10월, 부동산 투자 회사 이지스자산운용이 현 소유주인 싱가포르계 부동산 기업 CDL호텔코리아로부터 이 호텔을 사들이기로 하고 양해 각서를 체결했다. 이지스 측은 “현재 호텔 건물을 철거한 뒤 호텔·오피스·상업 시설 등을 갖춘 복합 시설로 개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당장 건축계에선 건물의 건축사적 가치를 강조하면서 철거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건축가 김종성이 설계한 밀레니엄 힐튼 서울 전경. /조선일보 DB

김종성은 전후 불모지였던 한국 건축계에 서구 선진 건축을 전파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서울대 건축학과에 재학 중이던 1956년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이 공대 건축학과에서 공부했다. 이후 1961년부터 10년 동안 미스 반데어로에(1886~1969·이하 미스) 건축사무실에서 근무했다. 미스는 르코르뷔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더불어 ‘근대 건축 3대 거장’으로 꼽힌다. “God is in the details(신은 디테일에 있다)” “Less is more(간결한 것이 더 아름답다)” 등 대중에게도 익숙한 명언을 남긴 건축가다. 김종성은 그를 직접 사사한 유일한 한국인 제자다. 1966년 일리노이 공대 건축학과 교수로 부임한 뒤 건축대 학장까지 지냈지만, 1978년 대우에서 호텔 설립을 위해 만든 계열사 ‘동우건축(현 서울건축)’ 대표를 맡으면서 귀국했다.

무심코 지나치는 도심 곳곳에 그의 작품이 널려 있다. 경희궁 터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 서울 서린동 SK 사옥, 경주 선재미술관(현 우양미술관), 서울 올림픽공원 내 역도경기장(현 우리금융아트홀),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 등이다. 현재는 미국 뉴욕에 거주하면서, 서울 삼성동 한전 부지에 들어설 ‘현대자동차 글로벌비즈니스센터’의 설계 책임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최근 포토 에세이 ‘로마네스크 건축: 이탈리아·크로아티아 편’ 출간 기념차 잠시 귀국한 그를 만났다.

◇김우중이 힐튼 설계 맡겨 美 교수 관두고 귀국

1979년 무렵 서울 힐튼호텔(현 밀레니엄 서울 힐튼)의 골조가 올라가는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저기 전나무 심어 놓은 화단 주변으로 작은 한옥이 여러 채 있었어요. 김 회장한테 그 한옥을 다 사들이라고 했어요. 보통 배산(背山)으로 짓는데, 나는 남산을 껴안는 형태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입구를 남산 쪽으로 내는 것이 설계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알 박기로 버틴 한옥이 한 채 있었는데 다른 집보다 네 배는 받아냈을 거야. 허허!” 호텔 로비 커피숍에 앉아 밖을 내다보며 노 건축가가 말했다. 주마등 스치듯 40년 전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힐튼 철거 소식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난 3월쯤 인터넷으로 기사를 보는데 힐튼이 부동산 회사에 매각돼 철거될지 모른다는 소식이 떴더군요. 정말 쇼킹한 뉴스였습니다.”

-젊음을 바친 프로젝트인데, 섭섭하셨겠습니다.

“부동산 투자 회사야 이익을 최대로 내는 게 목적이니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지요. 부지만 보면 허용 용적률 600% 중 350%만 써서 호텔을 지었기 때문에 철거하고 600%를 다 채우면 엄청난 이익이 생긴다는 셈법이지요. 그런데 뭐든 철거하면 돈 많이 버는 거로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힐튼은 내가 설계했다는 사실을 떠나서, 1980년대 한국 건축의 중요한 이정표가 된 ‘건물’이 아닌 ‘건축’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논리가 철거 후 다시 짓는 것일지라도, 뒤따르는 ‘사회적 손실’을 피하면서 최적의 개발 전략을 모색하면 좋겠어요.”

얼핏 무미건조한 건물처럼 보이지만, 힐튼 호텔은 군더더기 없는 ‘엄격한 절제미’를 강조한 미스의 건축 철학을 계승한 건물로 평가받는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한국인이 세계 건축계의 중심에서 학습한 결과가 설계와 구현 양 측면에서 높은 수준으로 이뤄진 사례”(건축가 황두진), “정교하고 우아한 비례로 세월이 지나도 기품을 잃지 않는 명작”(서울대 건축학과 서현 교수) 등의 찬사가 이어진다.

-재미난 에피소드도 많았겠습니다.

“김우중 회장이 아침 7시에 17~18개 계열사 사장을 모아 회의를 했어요. 모두 남색 작업복에 군화 같은 워커를 신고 전투하듯 일했지요. 김 회장은 ‘형님이 알아서 잘해 주세요’라면서 나한테 전권을 줬는데 위탁 운영을 한 ‘힐튼 인터내셔널’ 사람들이 까다로웠어요. 2m 정도 되는 50대1 모형을 들고 미국까지 가서 힐튼 인터내셔널 대표한테 직접 보여주고 컨펌 받았지요.”

우여곡절이 많았다. 1979년 2차 석유 파동이 터지면서 서울시가 1년간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사이 육군사관학교 도서관을 설계했다. 군인 출신인 김우중의 형 김관중씨가 다리를 놓아 대우가 기증한 것이었다. 호텔 건축 허가가 떨어지자 이번엔 성벽 근처에 있다면서 23층 계획안을 20층까지만 허용해 준다고 했다. 3개 층을 줄이려다 보니 원안보다 옆으로 퍼진 형태가 됐다. 최종안에선 결국 23층을 허가받았지만 이미 철골이 올라간 상황이라 옆으로 늘어난 비율을 줄이진 못했다.

일반인이 모르는 디테일도 있다. 23층 꼭대기 한쪽 끝엔 대공포대가, 반대편 끝엔 김 회장의 펜트하우스가 있었다. 김 회장, 객실 손님, 군인 동선이 엉키지 않게 설계했다. 기둥에 있는 동판은 일본에서 온 장인이 스펀지에 황산을 적셔서 일일이 닦아내 빛깔을 냈다. 벽에 붙인 녹색 대리석, 바닥에 붙인 베이지 빛깔 석재(트래버틴)는 건축 고전으로 꼽히는 미스의 대표작 뉴욕 ‘시그램 빌딩’에 납품한 이탈리아 업체에 연락해 공수했다. 김종성은 “스승이 천국에서 ‘잘했다’고 말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건축가 김종성이 설계한 힐튼 호텔 내부. 경사면을 살려 계단을 만들고, 가운데를 비워 공간감을 줬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김우중 회장 때문에 인생 항로가 바뀌었습니다.

“내 커리어의 은인이지요. 몇 십 년을 함께 일하다 보니 건축주와 건축가의 관계를 뛰어넘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됐지요. 그가 떠난 게 2년 전 이맘때(12월 9일)이지요? 빈소에 갔는데 결국 이렇게 작별하는구나 싶었지요. 막판에 세브란스에 입원해 있을 때, 김 회장이 자기가 베트남에 벌인 사업 현장에 가봐 달라고 해서 가기도 했어요.” 1980~1990년대 대우가 동유럽 미수교국 시장을 개척할 땐, 미국 여권을 가진 그가 김 회장을 대신해 답사하기도 했다.

◇의친왕비가 고모, 프란체스카 추천으로 미국 유학

그의 삶엔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겹친다. 고모는 의친왕비(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의 부인) 연안 김씨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광산 사업이 휘청해 가세가 기울었을 때, 서울 관훈동 사동궁(寺洞宮·의친왕 사저)에 들어가 산 적도 있다. “여섯 살쯤이었는데 고모한테 아침에 인사하러 가면 초콜릿을 주시곤 하셨지요. 마당의 버찌를 따 먹다가 고모부이신 의친왕은 몇 번 뵀는데 어려웠던 기억이 나고요.” 비슷한 시기 미국 MIT에서 유학하고 건축가로 활동한 영친왕의 아들 이구(1931~2005)와도 한두 번 만난 적 있다. 1974년 김종성이 한국에 교환 교수로 와서 풀브라이트 재단에서 강의했을 때, 이구가 다가와 “아임 큐 리(I’m Kyu Lee)”라면서 영어로 말을 걸었다고 한다.

 

-전쟁이 건축가의 길을 걸은 계기가 됐다고요?

“6·25가 터지고 사흘 만에 인민군이 서울로 쳐들어왔어요. 을지로에서 한옥에 살았는데 폭격으로 불타버렸어요. 설상가상, 아버지가 인민군에 납치돼 행방불명되셨지요. 그해 12월 화물열차를 타고 대구로, 다시 부산으로 피란 가 고등학교에 다녔어요. 1953년 수복하면서 서울로 돌아왔는데 도시 3분의 1이 사라져 버렸더군요. 대학을 지원해야 했는데 ‘잿더미가 된 서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뭐라도 ‘짓는’ 학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건축이었어요. 서울대 건축학과에 지원해 합격했습니다.”

 

1957년 미국 일리노이 공대 유학 시절 미스 반데어로에가 설계한 건축대학 건물 '크라운 홀' 앞에 선 김종성. /김종성·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미국 유학은 어떻게 가게 됐습니까.

“전쟁 직후라 대학 사정이 좋지 않았어요. 외국 건축 잡지를 겨우 한 권 구해 동기들하고 돌려 읽어야 했지요. 외국으로 가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어느 날 서점에서 ‘현대 건축의 소개’라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유명 건축가 작품이 여러 개 실렸는데 미스의 작품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뭔가 기둥에 보를 세우고 서까래를 얹는 한국 전통의 목조 건축 방식과 비슷했어요. 그가 학장으로 있던 일리노이 공대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경무대에서 일하던 육촌 형을 통해 프란체스카 여사의 추천을 받아 한미재단에서 한 학기 장학금을 받았다.

1956년 2월 5일, 일리노이대 교정에 도착한 첫날 밤을 어젯밤 일처럼 생생히 기억했다. “밤늦게 택시를 타고 캠퍼스에 도착했는데, 미스가 설계해 막 공사가 끝난 건축대학 건물 ‘크라운 홀’이 나타났어요. 장방형 유리 어항 같은 건물인데 형광등을 다 켜놔서 안이 훤히 보였어요. 그때까지 내 머릿속에 있던 ‘건물’의 개념은 4면이 벽으로 돼 있고 창과 문이 뚫린 형태였는데, 상상을 뛰어넘는 충격적 건축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기울어가는 조선 왕족의 삶을 곁에서 봤고, 전쟁을 겪었고, 하루아침에 아버지가 사라졌습니다. 청년이 감당하기엔 적잖은 혼란 아니었나요.

“제3자 입장에서 보면 소설도 이런 소설이 없지요. 그런데, 그 상황을 지나는 동안 신기하게 억눌리지 않았어요. 학비도 없는데 유학을 갔고, 대학 때 학년 말 전시에 미스 사무실 관계자가 와서 내 작품을 눈여겨본 게 계기가 되어 나중에 미스 사무실에서 근무했어요. 불운한 역사 한가운데 있었지만, 대단한 행운들도 몰려왔지요.”

-철과 유리를 주재료로 최소한의 구조와 골격을 쓴 미스의 건축은 ‘피부와 뼈(skin and bones)의 건축’으로 불립니다. 실제 그는 어땠습니까.

“절대 언성 높이는 법이 없었답니다. 뭔가 마음에 안 들면 그저 시가를 뻑뻑 피웠는데, 결국 후두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엄격했지만, 자신의 원칙이 공간을 해치면 기둥 옮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교과서를 통해서만 아는 미스와는 다른 면모가 있었지요.”

1960년대 미스 반데어로에 건축사무실에서 일하던 시절 김종성(오른쪽). /김종성·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오너를 겹겹이 에워싼 이들, 민심 가려

김종성이 설계한 경주 선재미술관(현 우양미술관). /김종성,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김종성이 자신이 설계한 사옥 중 대표작으로 꼽은 서울 서린동 SK 사옥.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김종성·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여러 재벌 프로젝트를 했는데, 오너들 공통점이 있던가요.

“김우중 회장이야 특수 관계였고, 조석래 효성 회장은 경기고, 일리노이 공대 동기라 효성 사옥을 지을 때 직접 소통했어요. 다른 오너들은 대체로 만나기 쉽지 않았어요. 한국 재벌 특성인데, 오너를 이중 삼중으로 에워싼 ‘문지기’들이 있어요. 오너하고 건축가가 직접 만난 자리에서 오너가 툭툭 말을 뱉으면 실무자들은 귀찮거든. 그러니 못 만나게 하는 거지.”

-이명박 전 대통령하고도 인연이 있다고요?

“삼호물산 사옥, 서울역사박물관 시공을 현대건설에서 했는데, 이명박씨가 그때 사장이었지. 비즈니스 감각이 뛰어난 사업가였어요.”

김종성이 설계한 서울역사박물관을 위에서 찍은 모습. /김종성·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지금 서울에서 눈에 띄는 건축물은 무엇인가요.

“민현준이 설계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최욱이 설계한 현대카드 영등포 사옥 등이 눈에 띕니다.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한 아모레퍼시픽 사옥은 정말 잘 지었어요. 중정을 두고, 외벽에 적정하게 각을 돌려 만든 차양을 설치한 것이 매우 창의적이에요.”

건축가 김종성이 서울 시내를 배경으로 서서, 트레이드 마크가 된 동그란 뿔테 안경을 매만졌다. 저멀리 왼쪽으로 그가 디자인한 서울 서린동 SK 사옥(빨간 마크가 있는 건물) 윗 부분이 보인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인생과 건축 공통점? 정답 아닌 ‘최적’ 찾는 과정

김종성은 1980년대 서울대 등에서 강의했다. 서울대 대학원 시절 강의를 들은 서현 교수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이라 다른 교수는 건축 잡지에 있는 사진을 흑백으로 복사해 설명했는데, 김 선생님은 프랑스의 르코르뷔지에 ‘롱샹 성당’ 등에 직접 가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당시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무림의 고수가 어떻게 설계하는지를 알려주셨다”며 “건축 교육에선 대체 불가능한 업적을 남기신 분”이라고 말했다.

-영화⋅음악 등 문화 전반에서 한류가 거세게 일고 있는데, 한국 건축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못 받는 것 같습니다.

“2012년 중국 건축가 ‘왕수’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 상을 탔는데 아직 한국 수상자는 없어요. 세계 건축계에서 아직 관심 대상이 아니란 얘깁니다. 데이비드 치퍼필드 작품이나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이 최근 설계한 송은문화재단 사옥 등 외국 스타 건축가가 국내에서 한 작품에 비해, 한국 건축가들이 달성한 성취가 부족한 느낌입니다. 일단 좋은 작품을 만들고, 우리 오피니언 리더들이 해외에 알리는 데 힘을 실어줘야 해요.”

김종성은 나이가 무색하게 연도⋅수치 등을 정확하게 말했다. 40년 전 설계한 건물의 기둥 사이 간격까지 정확히 말했다.

-기억력이 정말 좋으신데 비결이 뭔가요?

“선별적 기억과 선별적 망각. 필요한 것은 머리에 넣고 불필요한 것은 넣지 않으려고 해요.” 스승의 명언 “Less is more”를 생활에서도 실천하는 듯했다.

-1961년 건축 실무를 시작한 이후 올해로 건축 인생 60주년을 맞으셨습니다. ‘인생’과 ‘건축’에 공통점이 있을까요?

“젊은 시절 설계할 땐 ‘정답’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나이 드니 알겠더군요. 어떤 부분은 (건축주에게) 양보하고 어떤 부분은 강력하게 밀어붙이면서, ‘최선’을 찾아 절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생이든, 건축이든 ‘절대적 해결안(absolute solution)’은 없으며 ‘최적(optimum)’을 찾는 과정이 중요함을 터득했습니다.”

-어떤 건축가로 기억되고 싶은지요.

“세월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고 쟁쟁한 건축, 언제나 묵묵히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건축, 그런 건축 세계를 추구했던 건축가 김종성이 있었다고 기억된다면 최고의 영예 아니겠습니까. 허허!”

노 건축가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낡은 서류 가방을 든 채 ‘분신’을 쳐다보며 그가 말했다. “어때요, 아직 한물간 느낌은 아니지요? 나이 먹으면서 빛깔이 더 깊어지고 우아해졌지요?” 분명히 호텔을 두고 한 말이었는데, 자신을 향한 말처럼 들렸다. 그렇게 건축과 건축가는 한 몸이 되어 있었다.

건축가 김종성이 최근 펴낸 포토 에세이집 '로마네스크 건축: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편'

김미리 기자1미리 다른 시선을 꿈꿉니다.

 

출처 : 조선일보

기사원문 :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1/12/11/RJWQU3MSF5BSHMQUTBOFNPSI2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