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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MC. 만나

시카고 기행문

by KBEP 2008. 11. 4.

시카고 기행문

 

 

                                                                현  (북유럽 한인 CBMC연합회장. 암스텔담 거주)

 

 

 

 

200810 8부터 1주일간 미국 시카고에 간 이유는 두가지이다.

첫째는 제13차 한인기독실업인회(CBMC) 북미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고

둘째는 옛 친구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CBMC대회에 참가할 때 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방법으로 사역을 하며 살 수 밖에 없는 비즈니스맨들이라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용기와 능력을 주신다는 것이다.

또 항상 신실한 동역자들을 만나게 하시고 서로 용기를 북돋우며 도전을 주며 팀�을 하고 네트워킹을 하며 협력하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예외 없이 이번 대회에서도 많은 신실한 북미주의 형제자매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달 반 전 심장수술을 받느라 한국대회를 참석하지 못하여서 만나지 못하였던 오랜 친구이며 형제 같은 동역자들을 큰 기쁨으로 만날 수 있었다.

북미주에서 약 400명 정도 참석하였고, 한국에서는 신용한중앙회회장님, 창성사무총장님, 규형회장님, 류호성형제님부부 등이 참석하였다. 

유럽에서는 김남수총연회장님, 오진영상임고문님부부 그리고 우리부부가 참석하였다.

물론 임정규증경회장님도 참석하셨고 유럽에서 온 우리들을 크게 반겨주셨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CBMC 1930년 미국의 경제대공황 때 미국의 크리스쳔 비즈니스맨들이 시카고에 모여서 기도함으로서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심각한 금융위기가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이 때에 바로 CBMC가 탄생한 역사적인 도시 시카고에 한인기독실업인들이 모여서 회개하며 기도하였다.

모두들 우리 크리스쳔 실업인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진지한 모습들이었다.

왜 금융위기가 왔나?  무엇이 잘못이었을까?

우리는 땀 흘려 일하며 수고의 떡을 먹는 것보다 머니게임에 더 관심이 많지 않았던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보기 전에 우리의 얄팍한 지혜를 더 신뢰하지 않았는지? 주님의 뜻을 이루려 하기 보다는 우리의 욕망을 이루려고 허둥지둥 불철주야 바쁘지 않았는지? 쉽게 재물을 모아 보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진정 주님 앞에 회개할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와그너 사역연구원의 건호목사님의 설교와 간증은 우리들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우리 가정에는 드라빔이 없는지 돌아보게 했다.

성악가 화진교수님, 직장사역훈련센터의 영수목사님, 뱅쿠버 기독교세계관대학교의 승훈교수님, 김동윤장로님의 간증과 강의는 큰 감동과 도전을 주기에 충분했다.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시카고는 대호 중 하나인 미시간호 옆에 있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애들러천문대에서 바라보는 시카고의 빌딩들은 품위가 있고 건축미가 아름답다. 이러한 특이한 건축물들을 보기 위하여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시카고에 많이 찾아 온다고 한다.

옛 시카고는 1871년 대화재로 시내 중심에 있는 WATER TOWER(급수탑)를 제외하고 모두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었다고 한다. 그 후 새로 도시계획을 하고 재건하여 현재와 같은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었다고 한다.

높이 443미터, 110층 건물인 시어즈 타워에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날씨가 좋아서 멀리 인디애나, 위스컨신 주까지 보인다. 평평한 땅에 끝없이 넓게 퍼져있는 미국땅을 바라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현재의 깨끗하고 살기 좋은 시카고가 된 데에는 훌륭한 시장이 있다고 한다. 현 시장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시장이 된 분인데 어떤 사람은 시카고에는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데 눈을 잘 치워서 인기가 있어 시장에 재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눈 치우는 일은 시장의 잘한 많은 일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은 나는 1970년 승선실습을 하는 중 배를 타고 시카고 옆에 있는 갤리라는 곳에 왔었다. 배가 대서양에서부터 세인트로렌스강을 따라 올라오며 퀘벡, 몬트리올, 버팔로우,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를 거쳐서 갤리(시카고)까지 들어 온다. 100년전에 미국과 카나다가 협력하여 대운하 공사를 하여 2만톤급의 상선이 다닐 수 있다. 특히 에리호와 온타리오호 사이에는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어 배가 다닐 수 없으므로 그 옆에 월란드 운하를 만들었는데 갑문을 통하여 배가 100미터 위로 올라간다. 내가 왔을 당시 시카고에는 죤앤핸콕 빌딩과 옥수수 같은 빌딩이 큰 빌딩이었는데 지금은 옥수수 같은 빌딩은 다른 빌딩에 묻혀 잘 보이지도 않는다. 시카고도 참 많이 발전하였다.

 

10 12일 주일날 친구의 안내로 시카고 교회 남 배링턴에 있는 윌로우크릭커뮤니티교회에 갔다. 창립 33주년 기념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담임목사인 빌 하이벌즈 목사님이 33년전부터 지금까지 같이 사역해온 교인들을 강단에 모시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친구는 월로우크릭교회와 새들백교회를 한국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였으므로 빌 하이벌즈 목사님 과 구도자예배(열린예배)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빌 하이벌즈 목사님의 아버지는 아주 큰 농산물 도매업을 하였으며 자가용 비행기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자였다고 한다.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 주고 싶었지만 아들은 사업에는 관심이 없고 복음 전하는 일에만 열심이었고 장차 목회자가 되겠다고 하여 가업을 물려주지 못하였다고 한다.

윌로우크릭교회는 넓은 주차장이 있어 주차하는데 불편이 전혀 없고, 교회당 안팎에 교회를 나타내는 십자가도 없다. 교회당 내부 구조도 특이하여 약 5000석 규모의 큰 극장 같다. 의자도 편안한 극장용 의자이고, 강단도 일반 교회와 다르다. 마치 연극 무대처럼 낮고 넓. 성가대도 없고 목사도 가운을 입지 않는다. 그러나 음향 및 영상시설은 최고급 최첨단 수준이다.

구도자 예배는 현대음악으로 된 찬양을 듣고, 연극 공연을 보고, 복음을 듣는 순서로 진행된다. 신앙고백, 대표기도, 성경봉독도 없고 회심을 강요하는 말도 안 한다. 방문자들은 헌금을 드리지 않아도 된다. 청중을 무시하거나 죄책감을 주는 말은 하지 않으며 실생활과 관련 있는 설교를 한다. 이것은 비신자들을 철저히 의식하여 그들이 불편하지 않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복음을 듣게 하려는 연구에 의하여 정해진 것이라고 한다. 비신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면 양육을 하여 건강한 신앙인으로 키워간다.

이 교회는 토요일에 두번, 주일에 한번 구도자 예배를 드리는데 이것은 비신자 전도를 위한 예배이고 평일에 기존신자들을 위한 예배도 따로 드린다고 한다.

열린예배는 예배라기 보다는 오히려 비신자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한 전도집회 같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기존의 예배가 줄 수 없는 장점을 이 열린예배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도의 열정과 함께 복음을 가지고 교회가 비신자 들이 사는 세상 속으로 다가가는 강력하고도 효과적인 전도 수단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예배 후 우리는 넓은 라운지에서 커피와 도넛을 먹으며 교인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서점에서 책과 CD를 사고 은혜로운 성가를 부른 찬양사역자와 사진도 찍었다.

 

예배를 마치고 우리는 친구부부와 같이 약 300Km 장거리를 운전하여 미시시피강가에 있는 두부큐(Dubuque)라는 곳으로 갔다. 가는 길 좌우에는 옥수수 밭이 많이 보이더니 어느덧 언덕이 보이기 시작하고 단풍이 아름다운 경치가 보이기 시작한다.  

한참을 달려 미시시피강 가까이 오니 링컨 대통령 시절 북군 총사령관으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국 제18대 그랜트 대통령의 고향인 갈레나(Galena)가 나타난다. 오래된 장로교교회당을 비롯한 교회당이 많은 아담하고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드디어 미시시피강에 도착했다. 강 이쪽은 일리노이주이고 강을 건너면 아이오와주이다. 미시시피강은 미네소타주의 이타스키호에서 발원하여 미국을 남북으로 6270 Km를 흘러 멕시코만으로 흘러가는 미국에서 가장 긴 강이다. 대평원에서 생산된 곡물을 수출하기 위하여 뉴 올리언즈로 운반하는 중요한 운송로이기도 하다. 또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소여의 모험이나 허클베리 핀의 배경이 된 강이기도 하다.  

 

강가의 아름다운 단풍 경치도 좋고 친구가 예약해 놓은 강가의 호텔과 호텔 앞의 산책로는 아주 깨끗하게 정비가 잘되어 있고 참 멋이 있었다.

남쪽으로부터 배 한 척이 강을 거슬러 올라오더니 우리들이 있는 산책로 바로 앞에 있는 선착장에 붙인다. 높은 연돌이 두개 있는 것이 옛날 미시시피강에 다니던 증기기관으로 추진하던 외륜선(Paddle Wheeler)을 본 따서 만든 배였다.

배에서 나이든 부부들이 많이 내리는데 모두 가슴에 명찰을 달았다. 문득 배가 남쪽에 있는 미조우리주 쪽에서 왔다는 생각이 든 순간,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38년 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명찰을 유심히 보기 시작하였다. 왠지 내가 아는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던 것이다.

나는 아주 우연한 계기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미국 미조우리주에 사는 어느 여학생과 펜팔(편지로 친구를 사귀는 것)을 하게 되었다. 사진도 주고 받고 편지를 서로 주고 받으며 친해졌던 것이다. 사진 속의 아가씨는 참 예뻤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나의 여자친구라는 생각을 하면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1970년 나는 배를 타고 미국에 가게 되었고 드디어 그 아가씨을 만나게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이고 있었다. 그런데 배가 기항하는 곳은 뉴 올리언즈, 벌티모어, 디트로이트, 몬트리얼, 시카고 같은 곳으로 미조우리주에서 너무 먼 곳이어서 가거나 오기가 힘들어 결국 만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필 미국에서도 내륙 중앙에 있는 미조우리주에 사는 아가씨와 펜팔을 하여 미국까지 가서도 만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여간 유심히 명찰을 보았지만, 배에서 내리는 노부부들 중에는 나의 펜팔 아가씨는 없었다. 설혹 있다 해도 지금은 물론 옛날 사진 속의 예쁜 아가씨가 아닐 터이고 나와 같은 나이의 할머니가 되었겠지만 ……….

친구는 나를 위로라도 하듯 옛날에 알던 아가씨를 나이 들어서 만나면 꼭 실망하게 되므로 만나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하며 나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이었다.

 

친구 연택목사는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스코틀란드 및 미국의 칼빈신학대학에서 공부를 하였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자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로고스라는 선교선을 타고 다니며 선교도 하고, 한국 인천에서 목회를 하였고 또 미국에서도 이민교회를 개척하여 건강한 교회로 성장시켰다. 칼빈신학대학 교수,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하였고 책을 많이 쓴 목회자이자 학자이다. 올해는 안식년으로 쉬고 있는데 아마도 앞으로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할 것 같다.

누구에게나 편하게 대하는 밝고 소탈한 성격에 아주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먼 길을 다녀오는 길에 우리는 서로 지난 세월 살아온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그 중에서도 친구와 사모님이 들려준 한국과 미국에서 목회를 하면서 겪었던 많은 이야기들은 참 감동적이었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도 있었고 믿음으로 승리했던 신나는 이야기도 많았다.

비신자가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언젠가는 주님 앞으로 돌아 온다는 말을 하며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친구가 LA에서 이민목회를 하던 때 어느 비신자가 있었는데 그가 어느 주일날 골프를 치던 중 방울뱀에게 다리를 물려서 위급한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헬기를 타고 병원으로 수송 하던 중 점 점 독이 퍼져서 피부가 검은 색으로 변하고 의식이 흔들릴 때 그는 교회에 다니는 아내의 손을 잡고 만약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이들 일이든 무슨 일이든 모두 연택 목사님하고 상의하여 하라고 부탁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교회도 안 다니던 분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급한 순간에 뒷일을 부탁할 사람으로 목사님 생각이 난 것이다. 교인들이 중보기도를 하였고 다행히 목숨을 건졌고 처음엔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절단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 분이 교회에 다니게 된 것을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미국의 이민목회는 참 어려운 것인가 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코끼리를 울리면 큰 상금을 주겠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코끼리 귀에 대고 슬픈 이야기를 많이 했으나 코끼리는 전혀 울지 않았다. 그런데 이민목회를 하던 목사님이 코끼리 귀에 대고 한참 이야기를 하니 코끼리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코끼리 주인이 무슨 이야기를 하였냐고 물었더니 목사님은 이민목회하며 겪었던 이야기를 하였다고 했다. 이번엔 코끼리 앞발을 들게 하면 더 큰 상금을 주겠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시도를 하였으나 코끼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 또 목사님이 나섰다. 코끼리 귀에 대고 한마디를 했다. 그랬더니 코끼리가 갑자기 머리를 좌우로 막 흔들며 앞발을 번쩍 들어 휘젓는 것이었다. 코끼리 주인이 도대체 무슨 말을 했냐고 물었다. 목사님이 대답했다 너도 이민목회 한번 해볼래?”

 

아이오아주에서 돌아온 다음날 우리는 시카고 시내에 있는 무디기념교회에 갔다.

입구문이 잠겨있었는데 마침 기도하러 오는 교인이 있어 같이 들어 갈 수 있었다. 4000석 정도 되어 보이는 교회당 내부는 타원형으로 되어 있고 큰 파이프 올갠이 있고 성가대석이 강대상 바로 뒤에 있다. 이층에 있는 스테인드그라스가 아름다운 빛을 내고 있었다. 오래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아늑하고 품위 있는 교회당이었다.

 

디 엘 무디(D.L.Moody) 1837년 매사추세츠 주의 노스필도에서 출생�다. 무디가 4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을 가난한 농촌에서 보낸 무디는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아 초등하고 5년 다닌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무디는 어머니로부터 청교도적인 가정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7세 때,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나와 클린톤에서 신문 배달을 하다가 보스턴에 있는 삼촌의 가게로 옮겨 구두 수선 일을 하였다. 무디의 꿈은 빨리 돈을 벌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었고 신앙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1855년 주일학교 교사 에드워드 킴볼의 도움으로 형식적인 신앙 생활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참 구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후 무디는 시카고로 가서 잡화점을 운영하며 교회에서 주일학교를 맡아서 봉사하였는데 처음 16명이었던 주일학교가 몇 년후에는 1000여명이 모이게 되었다.

1860년 무디는 사업을 정리하고 복음전도에 전념하기 시작했는데 술집을 개조하여 만든 그의 설교 장소에는 주로 빈민층 사람들이 모였다.

무디는 교파나 교리에 매이지 않고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여 성경을 잘 알고 있었고  모든 설교를 성경중심으로 하였다. 무디는 수 없이 많은 집회를 인도하였는데 그 때마다 많은 청중들이 모여들었다. 자동차가 없던 시대였지만 그는 말씀을 전해야 할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사명을 다 했다. 그의 생애를 통해 수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교회와 성경학교, 성경연구원, 서적협회 등 많은 기관들을 발족시켰다.

무디는 나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라는 것을 믿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전도를 많이 한 사람으로 꼽히는 드와이트 무디는 신학교도 나오지 않았고, 설교를 할 때에도 많은 문법적 오류와 결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복음전도에 뜨거운 열정을 갖은 사람이었고 하나님은 그를 크게 들어 위대한 부흥사로 쓰셨다. 무디의 어린이 전도는 현대 주일학교의 모델이 되었고 그의 적극적인 청중전도는 현재 부흥전도집회의 모델이 되었다

1899 12 22 무디는 이 땅에서의 사명을 다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세계적인 복음전도자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졸업한 휫튼대학교에 갔다.

그 곳에는 도서관, 선교센터, 박물관 등이 들어 있는 빌리그래함 센터가 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 자신이 이 빌리그래함 센터를 세워 학교에 헌납하였다.

그는 미국의 기독교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사진과 자료들을 잘 정리하여 전시하고 또 자신의 일생과 복음을 전했던 사역의 기록들을 보존하여 전시하여 모교 후배들은 물론 미래에 올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미국을 축복하셨는지 또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였는지를 전하려 한 것 같다. 

 

박물관에는 100만여명의 신도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운집한 1973년 한국 여의도집회 사진도 있었는데 빌리그래함 목사님은 키가 큰데 반해 통역하는 목사님이 키가 작아 높은 발판을 놓고 올라서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또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전도여행을 다닐 때 들고 다니던 가죽 가방도 있고, 그가 사용하던 설교대도 있는데 생각보다 아주 작았다. 설교대 안 왼쪽에는 시계가, 오른쪽에는 타이머가 있었다. 설교대 위에는 성경책과 바인더가 하나 있는데 바인더에는  많은 성경구절들과 설교내용을 요약한 것이 큰 글자로 적혀 있었다.

나는 설교대 앞에 서 보았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설교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

빌리그래함 목사님은 1918년 11월 7 노스캐롤라이에서 출생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플로리다 성경학교에서 성경을 공부하였고 그 후 휫튼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첫 사역지로 일리노이주에 있는 작은 침례교회로 부임했는데 주 45불의 사례비를 받으며 7Km나 되는 거리를 걸어 다녀야 할 만큼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던 그는 서서히 국내외로 알려져 1944년부터는 크고 작은 수많은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어릴 적 그는 심한 말더듬이였다고 한다. 이것을 고치려고 날마다 숲에 들어가 나무들을 사람이라 생각하며 웅변 연습을 하였다. 그는 신학교 다닐 때부터 시간만 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해서 세계를 뒤흔든 명부흥사가 되었다. 그의 설교는 어려운 문장이 거의 없으며 단순하고 명료하다. 그는 전 세계를 돌며 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다.                 그는 조지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역대 대통령의 자문역활을 하기도 했으며, 개신교 사상 생존하는 인물 중 선교를 가장 많이 한 목사로 알려지고 있다.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그를 하나님이 축복하고 크게 들어 쓰신 것이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은 키가 크고 미남으로 잘 생겼다. 아름다우신 사모님과는 휫튼대학교에서 만나 1943년 결혼하였다. 목사님은 현재 90세이고 파킨슨씨병으로 고생하고 있으며, 65년간 동반자였던 사모님은 작년에 주님 품으로 갔다.

 

이번에 시카고 방문은 참 의미가 있는 여행이었다. 북미주 기독실업인회에 참가하여 동역자 형제들을 만나고 새로운 충전을 받은 것도 의미가 크다.

무디 선생님과 빌리그래함 목사님 같이 믿음과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시고 크게 들어 쓰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게 되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다른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필요에 따라 채워 주신다는 것을 다시한번 확신하게 되였다.

또 이번 시카고 방문 중 만났던 미국인들이 친절하고 솔직하고 열린 마음으로 남을 잘 도와주는 것을 보고 훨씬 더 미국인들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에게 있어서 여행은 항상 기대했던 것 이상의 기쁨과 교훈을 안겨 주었다.

이번 시카고 여행도 평생에 잊을 수 없는 뜻 깊은 여행이었다.

모든 여건을 허락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어느 시인이 말했다.

여행은 사는 법을 배우게 한다.

뜻밖에 의도하지 않은 길을 가게 될 때

계획하지 않은 길에도 즐거움이 있음을 터득하게 해준다.

낯선 곳에 가면 일상생활에서 닫히고 무뎌진 마음이 열리고

빈손의 자유로움도 느끼게 된다.

한 걸음 물러나 내 삶의 밖에서

담담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