Майк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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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文化/침묵의 시간

이 땅을 위해 피흘린 '파란 눈의 선교사'들을 아십니까?

KBEP 2008. 7. 10. 20:02

 

 

아프간 피랍사건이 발행하자 인터넷에는 “왜 가지말라는 곳에 마음대로 가서 봉사를 하느냐. 우리나라에서도 할 일이 많은데 무슨 짓이냐”는 비난이 빗발치고 있다. 동정론보다 우세한 듯 보이는 비난여론은 값없이 타국의 이웃을 섬긴 숭고한 봉사단원의 활동을 무참히 짓밟고 있다. 하지만 이름없이 오지의 땅을 밟고 그 곳에서 사랑을 전하는 무명의 봉사자들이 훗날 이웃의 삶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지 120여년. 그 시절 조선 역시 선교사들이 발을 디디기에 위험한 땅이었다. 열악한 환경으로 풍토병에 걸리기 쉬웠고, 서양의 종교인에 대해 경계하고 혐오하는 시선이 가득했다. 하지만 20~30대의 파란 눈의 젊은 선교사들은 한국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픈 자를 치료하고 문맹인에게 지식을 덧입히며 한국사회를 위해 헌신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지도에도 없는 작은 땅에서 죽어간 선교사들의 영은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힘이 됐다.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지금, 발전된 한국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이 이의를 달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120년 전, 한국 땅에서 쓰러져간 외국인 순교자들을 통해 아프간 사태를 보는 또 다른 시각을 찾아보았다.

성경을 전하고 참수당한 토마스 선교사

1866년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한국에 들어왔던 토마스선교사. 그의 죽음을 두고 과연 당시 영국인들은 손가락질을 했을까. 예수교에 대한 박해가 심한 것을 알고도 한 권의 성경을 이 땅에 전하려 했던 토마스 선교사는 “예수를 믿으라”는 말을 남긴 채 대동강 변 백사장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1885년 4월5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20대의 젊은 나이였다. 배를 타고 오랜 시간 항해 끝에 도착한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 당시 신학교 연맹 모임에서 선교를 꿈꾸던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조선은 1300만 민족이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 채 가난과 질병과 학대 속에서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그 나라가 드디어 작년에 문호를 열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 중 누군가가 조선 민족을 위해 선교사로 갈 것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조선을 선교지로 소개한 사람은 알버트 목사로 미전도 종족 복음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언더우드와 같은 배를 타고 한국에 들어온 아펜젤러선교사는 제물포에 도착한 부활절 아침, “예수님의 부활 권세와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는 이 민족에게 빛을 비추어 달라”고 기도했다.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운 외국의 선교사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에서 교회개척과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40세 짧은 인생을 마감하기까지 10여년의 사역기간동안 정동교회와 배재고등학교를 세우는 등 한국인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시간은 거기까지였다.

집회를 위해 목포로 가던 아펜젤러 선교사는 항해도중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되고 말았다. 그 대 조선소녀 하나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즉시 바다로 뛰어들어 소녀를 구하고 자신은 파도에 휩쓸려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아펜젤러의 죽음이 사고였다면, 한국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사라져간 순교자들도 있다.
미 감리회 파송으로 1918년 한국에 들어왔던 파울린 랜들 선교사와 미 남감리회 파송으로 1907년 교사로 교육사역을 시작했던 루비 켄드릭선교사는 급성 맹장염이라는 간단한 질환을 치료하지 못해 사역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한국을 사랑한 24살의 처녀 선교사

켄드릭선교사는 24살의 어린 여자선교사였다. 양화진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나에게 천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는 유언이 남겨져있었다. 그만큼 작은 나라 조선을 사랑한 것이다.

양화진에서 선교사들의 일대기를 가이드했던 이용남선교사는 “당시 천연두와 뇌염, 맹장염과 같은 질환으로 사역도중 별세한 선교사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질병은 특히 선교사 가족들에게 위협적이어서 어린 자녀들을 잃은 일이 다반사였다.

자녀 먼저 떠나보낸 곽안련선교사

평양신학교 교수로 활동한 찰스 알렌 클라크는 우리 이름인 곽안련으로 더 유명하다. 그는 40년 동안 한국의 계급타파와 남녀차별을 없애는 일로 헌신했지만 이국땅에서의 사역으로 자녀를 잇달아 잃는 슬픔을 당했다. 그의 둘째아들 버튼은 1904년 홍역으로 서울에서 사망했고 셋째아들도 1905년 소화기질환으로 생후 다섯 달만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터너선교사는 세 자녀를 모두 잃었다. 큰 아이는 생후 2개월만에, 둘째는 하룻밤을 못 넘기고 사망했다. 셋째 벤자민 터너는 5개월에 사망함으로써 모두 양화진 한 켠에 쓸쓸히 묻혀있다.

고아들의 친구 마리 위더슨 "나는 한국을 사랑했어요"

고아들의 친구였던 구세군 위더슨선교사의 부인 마리 위더슨은 거리에서 데려온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일에 힘썼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사역하는 등 오지사역에 익숙했지만 발진티푸스에 걸려 생사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8년 간 한국봉사를 마친 위더슨 부부는 1953년 6.25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을 돕기 위해 한국을 다시 찾았다. 위더슨 부인은 투병중에도 거리로 나와 전도지를 뿌리며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한국에 들어온 지 5개월만에 위암으로 사망한 위더슨부인은 “내가 죽어도 서러워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요. 오늘 나는 한국에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생각합니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파도에 휩쓸려 시신을 찾지 못한 아펜젤러의 후손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원망치 않고 한국으로 대를 이어 사역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에 묻히다

아펜젤러의 아들 헨리 다지는 14세 때 아버지의 죽음을 보며 한동안 방황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철이 들어 조선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고 배재학원 이사장으로 다시 우리 민족을 위해 헌신했다. 선교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던 헨리는 한국전쟁 소식을 듣고 다시 내한해 세계 많은 국가와 교회에 한국의 안타까운 상황을 알리며 구호에 힘썼다. 헨리는 미국이 아닌 한국 땅에 묻히길 원했다. 그 이유는 아버지의 무덤이 없기 때문이었다. 헨리는 “나를 한국 땅에 묻어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조선 사람을 사랑했는지 그들이 알도록 해달라”고 유언했다.

아펜젤러의 딸 레베카 역시 이대 강단에서 설교하던 중 뇌일혈로 사망했다. 그녀의 묘비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 그 땅에 복음과 학문, 의술을 들고 들어왔던 많은 선교사들의 헌신과 고귀한 죽음은 오늘의 한국사회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처럼 해외 오지를 향해 죽음을 무릅쓰고 선교와 봉사를 나가는 많은 이들은 한국을 위해 산화한 수많은 벽안의 선교사들처럼 “작은 헌신으로 그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사랑과 나눔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아이굿뉴스  이현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