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모르가데 에서 포르토마린 (Portomarín)으로 간다
10 km 이다
18,000보
숙소는
Albergue Ferramenteiro
이다
booking.com 에 숙소비용 체크할 것.
* 30유로를 숙소에서 아직 안 받았다고 해서
다시 손회장님 카드로 지급 함
* 저녁식사 를 숙소옆 식당(Mirador)에 예약 함.
뽈보. 가리비 , 비프스테이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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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테는 내려 가는 길이
어떤 이들에게 올라 가는 길이
될 수도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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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까지 93km 남았다는 표지석이 나온다
드디어 남은 거리가 두자리 수다.
좀 아쉬움이 함께 한다.
다시는 못 올 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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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 중에 묘지를 지났다
마을 언저리에 묘지가 있는 것을 보면서
묘지가 화려해서 한국의 상여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언젠가 나도 땅속에 묻히겠지.
저 묘지의 한 구석의 땅을 받아서 누워 있을 것이다
어릴 적에
왕십리에서 친구들과 구슬치기 하던 생각들..
국민학교 5학년때,
글짓기 대회에서 우승해서
교장 선생님이
전교생 5000명 앞에서
아침 조회하던 운동장에서
칭찬해 주셨다.
그로 인해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많이 기뻐하시던 생각들..
아버지는 그날 방과후에
특별히 내게 짜장면을 사 주셨다
그날은 온종일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이었다
무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한양 중학교에 배정받던 날.
왕십리 산꼭대기에서
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양중학교 시절
나는 말성꾸러기에 속한 과였다
방과후 친구들과
자전거를 빌려서 놀기 바빴고,
정월 대보름에 친구들과
쥐불놀이 하던 기억도 난다.
한양중학교 3학년 시절
어머니가 학교 교무실로 찾아와서
박덕규 담임 선생님을 만나셨다.
종태의 아버지가
허리 수술을 세 번 하는 탓에
수술비 부담으로 인해
부득이 종태를
중학교 휴학시키고자 함이었다
그때 박덕규 딤임 선생님은
당신의 월급으로라도
나를 휴학시키지 않고
학업을 계속 정진하게하셨다
그때 어머니께서
당신의 아들도 아닌 남이
본인의 급여를 통해서
남을 공부시키려는 마음을
알게 되셨고
그날 이후 어머니께서는
굳은 일을 모두 마다 안하시고
닥치는 대로 일하셔서
나를 공부시키셨다
풀빵 장사, 냉차 장사, 세탁소 등..
그때 생각이 선하다
마음 한켠이 뭉클해 진다.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교 친구들과 참 많이 놀았다
밴드를 한다고(난 베이스 키타)
많이 돌아다녔다.
고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계속 일탈 없이 살아왔던
인생에 대한 반감으로
고등학교 마지막 등록금을 가지고
경포대 겨울바다로 갔다
그렇게 니는 인생의 첫 일탈를 경험했다
대학 수능 시험을 보고
전기 대학교에 신문 방송학과를 가길 원했지만 낙방하고
후기 대학교인
광운대학교 무역학고에 입학했다.
광운대학교 방송반(kwbs)에 가입해서
방송반에 아나운서 역할을 했다.
동료 및 선후배와 막걸리를 함께 마시며 깡통 철학을 안주 삼았다.
아내를 처음 만난 건
대학교 1학년 때 였다.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가 열렸던
서울 시내에서 만났다.
국군의 날 행사를 구경하던 인파로
많이 사람이 모여 있던 자리에서 바로 내 앞에 아내가 있었다.
여기 자리가 분주하니
어느 다방에 들어가서
tv로 국군의 날 행사 를 보자고 제안을 했다.
그렇게 우린 사귀게 되었다.
대학 3학년을 마치고
군대 갈 때
학교 방송국에 있던 탓에
카셋테이프에 여러 음악을 녹음해서 줬고,
군대에서 보안부대애 차출 된 탓에
시간이 있어서
군대 상병 때 결혼을 했다.
문서 수발병으로
매일 서울을 갔고
보안사령부로 차출이 되면서
장교봉급에 준하는 할동비를 받는 등 여러 혜택을 받으면서
결혼을 하게 된다.
제대후 회사 생활을 하다가
불가리아로 해외 첫 출장을 가게 되었고, 출장 중에
불가리아에서 사업을 결심하게 된다.
동유럽이 공산주의에서
무너져내린 1990년부터
현재까지 사업을 하면서
모든 불가리아의 변화를
직접 체험하게 된다.
'라면왕,으로
매월 60만개씩 라면을 불가리아에 판매하면서
내 브랜드 '미스터 팍'에 대한
인지도가 계속 늘어났다
친 동생 가족이 모두 불가리아에 왔다.
가족 모두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기 위해
불가리아를 거쳐 가고싶다한다.불가리아에서 머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했다
우리 회사에서 이사로 있으면서 창고 일을 담당하는 일을 마련했다.
이후, 동생은 관광업으로
한국 식당으로
그리고 식품 유통 사업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프랑스에서
나 같은 일을 하는 교민 사업자와
동업 아닌 동업을 위해 일을 하다가
약 사기를 당하고
오랫동안 해왔던 식품 유통 사업을 접게 되었다
불가리아에서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쌓아온 인맥을 통해
불가리어에 여러 프로젝트를 직접 진행하게 되었고,
한국이 종주국으로 되어 있는
'인삼'을 첫 프로젝트 아이템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불가리아 전국적으로
4개의 직경 농장을 통해
인삼재배 데이터를 모았고
이로 인해 불가리아 농식품부의 추천을 받은
불가리아 농부들을 대상으로
불가리아 인삼 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농부들은
농사에는 익숙하지만
밭작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수만평의 농지 가운데 약 300평 정도를 인삼재배 실험 농장으로 인삼 재배 경험을 쌓게 하고
이후에 경험이 쌓였을 때
인삼재배 경작 면적을 넓히는
방향으로 가르쳤다
인삼이
품종 등록이 되어 있지 않으면
인삼 재배는 지인들끼리
수확해서 나눠먹는
그냥 작물에 불과하다
불가리아의 IYASAS라는
식품 품종 등록 기관을 통해
3년의 시간을 들여
인삼 품종 등록 작업을 위한
계약 및 재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하여
불가리아 인삼은
2024년도 12월에 품종 등록을 하게 된다.
전 세계의 인삼을 주로 재배하는 국가는 4개 나라이다
한국 중국 캐나다 (토론토 지역) 미국 (위스콘신 지역) 이다.
특별히, 캐나다의 50%가 넘는
인삼 농부는 과거에 캐나다에서 담배를 재배했다.
담배 경작 조건과
인삼의 경작 조건이 많이 일치한다.
그래서 캐나다의 담배 농부들은 캐나다 인삼 재배로 쉽게 이전을 했다.
불가리아는 전통적으로 담배 재배가 아주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유럽 중앙정부에서
불가리아의 담배 농부들에게
지급하던 농업 보조금을
담배가 인체 해롭다는 이유로 2024년부터 중단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불가리아 담배 농부들은 다른 작물 재배로 전환이
매우 시급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때에, 불가리아 인삼 품종 등록을 하게 되어
정식으로 유럽 중앙정부의 농업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향후 인삼 종주국인 한국 인삼 품종의 '속'으로 불가리아 인삼을 그 밑으로 넣을 예정이다.
한국 보건복지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한국 보건산업 연구원이 있다.
한국 보건산업 연구원(KHIDI)에서
한국 병원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한국 디지털 병원 수출 조합(KOHEA)라는 조직이 있다.
그 조합에서 주로 하는 일은
한국에 병원 시스템이나 한국의 의료기기를 수출하는 토탈 창구 역할을 한다.
한국 보건복지부의 지원을 받아서, 한국의 벤처 1세대인 메디슨의 이민화 총장이 주관하여 만든 조직이다.
그 조직에서
20 15년에 서울에서
한국 디지털 병원 수출 관련
수출 상담회를 개최하였다
그 병원 수출 상담 회의에
불가리아의 PIROGOV 응급병원장과 함께
참가를 하였다.
그 참가로
한국 디지털병원 수출 조합이
어떤 경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고
그다음해인 2016년에
그와 매우 유사한 조직인
'디지털 메디컬 클러스터'를
불가리아의 병원, 의대 교수,
변호사, 기업인 들을 모아서 불가리아에 설립하게 되었다.
그 클러스터에
한국과의 일을 전담하는 사람으로
내가 부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2019년에
불가리아의 정치 수반인 총리가 국빈 방한을 하게 된다.
그때 불가리아 수상의 전용기로
나도 같이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이때 한국 디지털 병원 수출 조합과 불가리아 St.Ivan Rilski병원의 병원 현대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파일럿 프로젝트로서
HIS 시스템을 한국 디지털 병원 수출 조합에서 도입하기로
계약을 맺게 된다.
2020년 5월에
불가리아 Saint Ivan Rilski병원을 방문하기로 했던
한국 디지털병원 수출 조합 이사가
코로나로 인해
비행기 티켓을 발행하고도
못 오는 바람에
수출 계약의 진행이 어렵게 되었다.
동시에
한국 디지털병원 수출 조합을
창립했던 이민화 총장이
간암으로 소천하여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있었다.
그때 불가리아 병원 팀들이 내가 오랫동안 인삼을 한 것을 알고
유럽에 수요가 큰 한방병원으로 프로젝트를 바꾸는 게 어떠냐? 는 제안이 있었다.
그 때,
한국 보건산업 진흥원에서
한국 병원의 해외 진출지원 프로그램이 생겼다.
불가리아의 병원 현대화 프로그램을
한방 병원의 유럽 진출 프로젝트로 변경하여
한국 보건산업원에서 진행하는 병원 해외진출 지원 프로그램에 응모하여 선정되었다.
한국의 경희대학교 한방병원과 프로젝트 진행을 같이 하게 되었다.
2022년 6월에
경희대학교 의과학 연구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방병원 교수,
병원 해외 진출 컨설팅 회사의 전무,
한국 수출입 은행의 전 이사
이렇게 4분이 불가리아를 방문하게 되었다.
불가리아에서 여러 병원들과 미팅이 있었고,
최종적으로 동 프로젝트가 진행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경희대학교 차원에서 있었고
경희대학교 의과학 원장이 팀장으로 있었던 프로젝트 팀은
경희대학교 의료원 원장이자 경희대학교 부총장이 직접 팀장을 맡는 식으로 승격 되었다.
2022년 10월에
경희대학교는
3명의 2차 불가리아 방문 델리게이션을 보낸다.
경희대학교 한방병원의
한방의사와 간호사 등으로 조직된
약 10명의 팀을 불가리나로 파송하려고 결정하게 된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한국 의사가
유럽 정회원국인 불가리아에서 의사 면허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래 한방병원 프로젝트를 불가리아에서 시작하려고 했을 때,
의사 면허 문제는
중요한 사안이어서
경희대학교 한방병원이 들어서는
불가리아 사파라바바냐 지역을
의료관광 특구로 지정해서
한국의사가 제한된 특구내에서먼 의사 활동을 하게 하려 했다.
불가리아의 정치 상황이
불안정하면서
여러 보건부 장관들이
교체되는 과정 가운데
아직 그 끝을 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있다.
불가리아에 한국과 불가리아 간에 사업 증진 등을 위해서
불가리아 한국 상공회의소가
3개조직되어 있다.
나는 3개 상공회의소에서 모두 한국 관련 일을 하는
부회장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 불가리아 수교 이후 이렇다할 교류 진행이 없는 것으로 보여서
한국 불가리아 교류진흥협회(KBEP)를 내가 주도적으로 설립하게 되었다.
협회의 멤버들은 주로 전직 장관들 위주로 되어 있다.
필요하다면 현직 장관들의 CABINET과
바로 연결해 줄 수 있는 분들이다.
협회를 만들고 똑같은 이름으로 법인을 불가리아와 한국에 설립했다.
협회에서 내가 주도적으로
지금까지 이끌고 왔던 프로젝트들을 진행하고
그것이 실질적으로 진행이 될 때 법인을 통해서
진행을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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