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반일 시위 주도로 형무소 수감…항일투쟁 지속
군수품 및 독립 운동자금 전달, 한의사로 독립운동가 치료
자생한방 "잊혀진 한의사 독립운동가들의 정신 계승할 것"
- 이병문 기자
- 입력 : 2022.08.16 12:17:06
자생한방병원은 독립운동가이자 한의사로 항일투쟁에 몸 바친 청파 신광열 선생에게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이 서훈됐다고 16일 밝혔다. 신광열 선생은 자생한방병원 설립자 신준식 박사의 선친이다.
함경남도 북청 출신인 신광열 선생은 1930년 3·1운동 11주년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벌어진 반일 시위운동의 주동자로 지목돼 경성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수감번호 '1679'를 부여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옆구리에는 일본 경찰의 칼에 길게 벤 자국이 남았다. 또한 출소 후에는 독립운동가 치료 및 군수품, 독립운동 자금을 항일연합군부대에 조달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독립운동가 신익희 선생이 주도하던 정치공작대에서 함경도 책임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구국활동에도 앞장섰다. 특히 미국 중앙정보부(CIA) 보고서와 월남유서의 자필기록 내용이 일치하면서 관련 업적들이 사실로 밝혀지게 됐다.
이번 신광열 선생의 서훈은 지난 15일 광복절을 맞아 진행된 독립유공자 포상과 함께 이뤄졌다. 자생한방병원 설립자 신준식 박사는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재조명하는 일은 대한민국을 있게 한 초석을 확인하는 과정"이라며 "특히 자생한방병원은 일제강점기 핍박 속에서 쇠퇴하던 한의학을 지켜낸 한의사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민족병원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신준식 박사의 숙조부 신홍균 선생이 2020년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서훈됐다. 신홍균 선생은 독립군 3대 대첩 중 하나인 대전자령 전투를 포함한 여러 전투에서 한의사이자 군의관으로서 활약하며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이처럼 숙조부와 선친에 걸친 선대의 민족 정신을 이어받은 자생한방병원과 자생의료재단은 국가유공자와 후손들을 예우하는 사회적 분위기 형성을 위해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전개·발전시키고 있다. 국가보훈처와 함께 진행한 독립유공자 및 후손에 대한 한방 의료서비스 지원 사업을 필두로 총 3억원 규모의 척추·관절 질환 치료를 2019년과 지난해에 각각 실시한 바 있다. 올해는 지원 대상을 6·25 참전유공자까지 확대해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들을 잊지 않기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또한 독립유공자 후손을 대상으로 3년간 3억원 규모의 생활지원금과 장학금을 전달했으며 생존 애국지사를 직접 찾아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생존 애국지사 한방주치의'사업과 해외에 거주하다가 귀국한 영주귀국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위한 주거지원 등 각종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국가보훈처장으로부터 독립유공자 복지증진 공로 감사패를 수상하기도 했다.
◆독립유공자 청파 신광열 선생의 생애
청파 신광열(1903.2.13~1980.11.11)은 독립운동가이자 한의사다. 1903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나 9살이 되던 해 만주로 향했고 그 곳에서 일제가 자행한 침략을 보고 자랐다. 성인이 된 1925년에는 제일 정몽학교의 훈도(교원)로 재임했다. 당시 정몽학교는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으며 모든 교사들 또한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독립운동가 육성에 힘을 쏟았던 그는 1930년 간도에서 3·1절 11주년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일어난 만세 시위를 이끌었다. 학생들은 일본 조계지 철조망 앞에 서서 집회를 전개했고 이에 일본총영사관 기병대는 무력 진압을 시작했다. 당시 주동자로 지목 받았던 신광열은 현장에서 경찰이 휘두른 경찰도에 맞아 옆구리에 30cm나 되는 큰 자상을 입었다. 이후 간도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돼 경성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됐다. 수감번호 1679번) 석방 후 그는 의사 시험에 합격해 만주에 광생의원을 개업한다. 이후 8년간 의원을 운영하며 비밀리에 부상을 입은 독립운동가들을 치료했다. 1942년에는 숙부인 독립운동가 신홍균을 따라 만주 목단강시 동승촌으로 향한 신광열은 군수품과 독립운동 자금을 항일연합군부대에 조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45년 광복을 맞자 그는 해동 신익희 선생이 주도하던 정치공작대에 가입했다. 신광열은 함경도 책임위원을 맡아 북으로 파견돼 구국활동을 펼쳤다. 훗날 신광열은 가문의 독립·구국 활동을 월남유서를 통해 기록으로 남겼다. 분단 이후에는 국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하다가, 일제의 한의학 말살정책으로 위기에 처한 한의학을 살리기 위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고 1955년 한의사 시험을 합격했다.
한방과 양방의 의사자격을 모두 취득한 신광열은 아산시 도고역 앞에 청파 한의원을 개원한 뒤 의료시설이 낙후된 마을로 17번이나 이사를 다니며 지역의료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80년 작고때까지 의료활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6대에 걸쳐 온 가전 비방과 한·양방고서들의 처방을 담은 '청파험방요결'을 집필하는 등 민족의학 부흥의 토대를 쌓았다.
[이병문 의료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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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매일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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