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레스바이플
- 입력 2022.02.14 09:21
- “GDP 70% 이상의 제3차산업 주축 산업구조”
1839년 국왕 레오폴드 1세 중심…네덜란드로부터 독립
전력의 50% 원자력 의존 2025년까지 단계적으로 폐쇄
1885년~1962년까지 ‘콩고, 르완다와 부룬디’ 식민제국
투치족 우대정책 독립후 ‘르완다와 부룬디’ 대규모내전
● 1839년 7월 21일 ‘벨기에 왕국의 독립’
벨기에는 기원전 3 세기 경 갈리아(Gaul)의 북부 지역에 살았던 벨기에(Belgae) 종족들로부터 벨기에(Belgium)라는 이름을 따온 것으로 믿어진다. 벨기에는 본래 네덜란드의 남부 지역이었으나 네덜란드 독립 전쟁(1568~1648년) 이후 북부와 분열되면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1793년 프랑스는 벨기에를 합병하였다. 그러나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열린 ‘빈 회의’에서 벨기에를 다시 네덜란드에 편입시켜 네덜란드 연합 왕국을 형성하였다. 1814년 9월 1일에서 1815년 6월 9일까지 열린 빈회의 목적은 나폴레옹 전쟁의 혼란을 수습하고, 유럽의 상태를 전쟁 전으로 돌리는 것이 목표였다.
이어 1830년 8월 5일경 벨기에 지역은 네덜란드를 상대로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 이를 벨기에 사람들은 벨기에 혁명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이 날을 독립 기념일로 여긴다. 네덜란드가 편성한 진압군은 벨기에군을 간단히 격파하였으나 벨기에를 다시금 병합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프랑스의 외교적 압력으로 인해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1831년 휴전을 맺고, 1839년 7월 21일 런던 회의에서 프랑스, 영국, 프로이센 등의 강대국들로부터 독립과 중립화를 확약받았다. 드디어 국왕 레오폴드(Leopold) 1세 중심의 벨기에 왕국의 독립을 성립되는 순간이었다.
● 3차 산업 중심의 고도화된 산업구조
벨기에는 좁은 국토와 낮은 부존자원 등 불리한 조건들을 극복하여 무역과 기술 개발로 경제성장을 이룩한 서유럽의 부국이다. 수출액이 GNP의 3분의 2를 넘고 있는 벨기에는 세계 무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벨기에의 무역 이점은 서유럽에서 중앙 지리적 위치와 고도로 숙련되고 다국어를 구사하는 생산적인 노동력에서 비롯된다. 무역의 약 4분의 3이 다른 EU 국가들과의 거래이다.
벨기에는 서비스 산업이 GDP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3차 산업 중심의 고도화된 산업구조를 가진 나라이다. 2021년 2분기 기준 벨기에 산업별 GDP 비중은 서비스업(76%), 제조업(18%), 건설업(5%), 농림수산업 (1%) 순으로 고부가가치의 서비스 산업중심으로 발달했다. 최근에는 R&D를 포함한 정보 통신, 기술관련 서비스 산업도 발달 중이다.
다음으로 밸기에의 친환경 에너지 정책을 알아본다. 벨기에는 우리나라 경상도만한 크기에 경상도만한 인구를 지닌, 비교적 작은 국가이다. 크기는 작은데 원자력발전소는 7기나 있어서 필요한 전력의 50%를 원자력에 의존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 원전 대부분이 노후 원전이라 신뢰성이 낮은 상태라는 것이다.
벨기에는 205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사용률 100%를 달성하기 위한 에너지 전략으로 2030년까지 원자력 발전소 폐기, 2050년 이후 클린경제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가동 중인 원전을 2025년까지 단계적으로 폐쇄하기로 되어 있으며, 원자력 대체 에너지원으로 천연가스를 사용할 예정이다.
아직 벨기에는 연방국가차원에서 저공해구역을 지정하고 있지 않지만, ‘탄소 저배출 구역(LEZ Low Emission zone)’을 지정해 기준에 미흡한 자동차의 이용을 제한하는 지자체가 있다. 외국 등록차량이 해당 구역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각 지자체의 웹사이트에서 온라인으로 미리 등록을 해야 한다. 등록은 무료이며 각 지자체가 정한 자동차배출가스 기준치 이상에 해당하는 차량에 한해서 해당도시의 1일 출입허가증을 판매하고 있다.
한편, 벨기에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 중 하나로 초콜릿을 들 수 있다. 벨기에는 전체 생산량 중에서 무려 85% 이상을 수출하고 있고, 전 세계 초콜릿 수출규모의 10.95%를 차지할 만큼 수출대국이다. ‘초콜릿의 수도’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벨기에는 고급 초콜릿의 대명사로 불리는 ‘프랄린(praline)’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프랄린은 딱딱한 초콜릿 속에 부드러운 크림, 누가, 헤이즐넛, 과일, 커피, 리큐어 등이 들어가 있는 형태를 지칭한다.
● 잔혹의 흑역사 ‘식민제국의 시대’
벨기에 식민제국은 1885년부터 1962년까지 벨기에가 소유하고 있던 식민지를 가리키는 제국이다. 구체적으로는 벨기에령 콩고(현재의 콩고 민주공화국), 르완다 공화국(Republic of Rwanda), 부룬디 공화국(République du Burundi)을 말한다. 벨기에령 콩고는 1960년 6월 30일에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독립했고, 1962년 7월 1일에 르완다 공화국과 부룬디 공화국으로 각각 독립했다.
레오폴드 2세는 아버지인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의 뒤를 이어 1865년 왕위에 오른다.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리던 시기이다. 레오폴드 2세는 강력한 벨기에 건설이라는 제국주의적 야심을 위해 콩고를 식민지로 삼으려고 하였다. 콩고는 벨기에 왕국에 귀속된 영토가 아니라 국왕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사유지나 마찬가지였다.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1835~1909)는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캄보디아 ‘킬링필드’ 대학살의 주범 폴 포트, ‘아프리카의 히틀러’ 우간다의 이디 아민처럼, 역사상 가장 잔혹한 통치자로 악명이 높다.
1879년 레오폴드 2세는 국제아프리카협회의 명칭을 ‘국제콩고협회’로 바꾸었는데, 기존의 국제아프리카협회가 유럽국가들 사이의 명목에 불과한 단체였다면, 국제콩고협회는 레오폴드 2세의 실질적인 콩고 지배기구가 되었다.
레오폴드 2세 지배 당시 콩고 자유국에서는 수백만 명의 목숨이 희생되는 무력과 착취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벨기에 레오폴드 2세는 콩고를 지배하면서 지옥으로 만들었다. 당시 세계적으로 수요가 폭증한 고무 생산을 늘리기 위해, 콩고 원주민에게 할당량을 지정하고 이를 맞추지 못하면 손목을 자르거나 처형당하는 등 그 통치는 매우 잔인하였다.
레오폴드 2세가 콩고를 지배한 기간은 20년 남짓이다. 대략 당시 콩고 인구의 50%에 달하는 1,000만 명의 콩고인들이 이때 죽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레오폴드의 콩고 자유국 지배의 실태가 알려지면서 국제사회는 물론 본국에서도 규탄의 목소리가 커졌고 1908년 벨기에 의회는 레오폴드에게서 콩고의 지배권을 빼앗고, 인권침해 금지 법안을 제정하였다.
이로부터 1세기가 한참 지난 2020년 6월 30일, 벨기에의 필리프 국왕은 사상 처음으로 벨기에의 식민통치 기간 동안 콩고민주공화국이 받은 피해에 대해 ‘사과’를 표명했다. 필리프 국왕은 독립 60주년을 맞은 콩고민주공화국의 ‘펠릭스 치세케티(Félix shisekedi)’ 대통령 앞으로 보낸 서한에서 “나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에 의해 그 고통이 다시 깨어난 과거의 상처들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고 싶다”고 밝힌 것이다.
● 르완다-부룬디 ‘종족분쟁 불씨’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벨기에는 르완다와 부룬디를 차지하여 벨기에령 루완다-부룬디를 만들어냈다. 원래 르완다-부룬디는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6년부터 1924년 동안 행해진 벨기에의 군사원정으로 획득한 독일의 동아프리카 식민지였다.
후투족(Hutu)과 투치족(Tutsi)의 부족 갈등이 본격적으로 심화된 계기는 1919년 르완다가 벨기에의 식민통치를 받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벨기에는 1962년까지 약 40년 이상을 부룬디-르완다를 식민 지배하면서 종족 분리정책을 실시했다. 벨기에 정부는 투치족을 타 부족들과 차별하며 르완다와 부룬디 국민들의 원성을 자아냈다.
‘투치족이 후투족보다 키가 더 크고 코가 오뚝하다’는 말을 퍼트려 두 부족 간의 이질성을 강조하고, 부족을 표시하는 신분증을 발급했으며 소수부족인 투치족에게 정치, 경제, 교육 방면에 특혜를 베푸는 등 차별대우를 일삼았다. 이로써 투치족은 벨기에 지배 기간 동안 후치족에게 철저한 지배권을 행사했다. 이는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반목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2년 7월 독립 이후에도 르완다에서 투치족은 후투족에 대한 강압통치를 계속해나갔다. 하지만 1963년 12월, 이에 반감을 품은 후투족이 2만 명의 투치족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 두 부족 간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어 갔다. 이로부터 10년 뒤인 1973년에는 후투족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는다.
반대로 후투족 정권이 투치족을 억압하자, 투치족은 1990년 10월 ‘르완다 애국전선(RPF)’을 조직, 정부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르완다에서 본격적으로 내전이 발발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이 내전이 2년간 계속되자 UN과 아프리카단결기구(OAU)는 1993년 8월 중재에 나서 두 부족 간의 ‘아루샤 평화협정(Arusha Peace Accords)’을 이끌어낸다.
그 와중에 1994년 4월, 후투족 출신의 ‘하비야리마나’ 대통령이 암살되자 르완다 내전의 불씨가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극우 후투군 조직인 ‘인터함웨(interhamwe)’은 대통령 암살에 투치족이 개입했다며 투치족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에 RPF가 맞대응에 나서면서 인터함웨와 RPF의 갈등이 민간인에 대한 보복 행위로까지 확산되기에 이른다.
르완다 내전은 1994년 4월에 발발해 내전이 진행된 100여 일 동안 학살당한 사람만 총 100만 명에 이르는 대학살의 사건이었다. 1994년 7월 투치족 반군이 정권을 장악, 신정부를 출범시키자 구 후투족 정부는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의 고마(Goma) 지역으로 피신, 1994년 10월에 망명정부를 수립한다.
투치족 신정부가 후투족 반군에게 국가 재건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으나 투치족의 보복을 우려한 후투족이 귀국을 거부하면서 난민 사태는 장기화되기에 이른다. 더욱이 구 후투족 정부군이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에 개입하여 사태를 격화시키면서 르완다 내전의 파장은 아프리카 전체로 확대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현재까지도 여전히 후투족 반군이 르완다 국경 바깥에서 진입을 노리고 있으며 르완다 내에는 1994년 내전 때의 학살과 관련해 후투족 8만 명 가량이 투옥돼 있는 실정이다.
한편, 르완다와 마찬가지로 1962년 부룬디는 독립했지만 르완다처럼 다양한 민족들이 있었고, 이들은 뭉치지 않고 서로를 불신하여 내분이 심해졌다. 투치족 중심의 군부가 장악한 부룬디 정부는 정부와 군부 내에서 후투족을 대거 숙청시켰다.
이에 따라 후투족 난민들이 대거 국외로 떠나는 와중에 1972년에 후투족이 군사시설을 점령하자 투치족 군부는 그 보복으로 20만에 달하는 후투족을 학살했으며, 10만 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했다. 이후 속개된 내전 수십 년 동안 발생한 피해자까지 사망자만 최소 25만 명에 달한다. 그리고 수십만 명의 피난민이 콩고민주공화국과 탄자니아로 탈출하였다.
그래서 주로 부룬디 내전은 르완다 내전과 같이 언급되거나 르완다 내전 다음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차이점은 르완다에서는 후투족이 투치족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다면, 브룬디에서는 후투족이 학살을 저지르고 투치족이 보복으로 학살을 저지르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학살했다는 점이다.
출처 : 프레스바이플(http://www.pressbyple.com)
기사원문 : http://www.pressbyple.com/news/articleView.html?idxno=55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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