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민 기자
- 입력 : 2022.02.11 12:05:17
- 유럽연합(EU)이 논란 끝에 원자력 발전 투자를 ‘녹색경제’로 분류하는 최종안을 확정했다. 원전을 녹색분류체계에서 제외해 ‘탈원전’에 속도를 내는 우리나라 에너지 정책에도 적잖은 파장을 미칠 전망이다.
▶‘EU택소노미’ 내년 시행
‘ ▷원전은 녹색경제’ 강조
EU 행정부 역할을 하는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2월 2일(현지 시간) 원자력과 천연가스 발전 투자를 친환경 활동으로 분류하는 ‘지속 가능한 금융 녹색분류체계(Taxonomy)’ 즉 ‘EU택소노미’를 확정, 발의했다. EU택소노미는 EU가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친환경 활동 기준이다.
EU는 향후 4개월간 회원국과 의회 논의를 거쳐 승인을 받은 후 2023년 1월부터 EU택소노미를 시행할 예정이다. EU 27개 회원국 중 20개국 이상, EU 의회 과반수가 반대하면 부결된다. 원전 의존도가 높은 프랑스뿐 아니라 핀란드, 폴란드, 체코 등 주요국이 확정안을 지지하는 만큼 부결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EU 현지 분위기다.
확정안에 따르면 신규 원전 투자가 친환경 활동으로 인정받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투자 대상이 될 신규 원전은 2045년 이전에 건설 허가를 받아야 하고 기존 원전 수명 연장은 2040년까지 승인이 필요하다. 신규 원전을 짓는 EU 회원국은 2050년까지 방사성 폐기물 처분시설을 운영하기 위한 상세 계획을 세워야 한다.
EU가 원전을 녹색에너지로 분류한 배경에는 글로벌 에너지 대란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북해 지역 풍속이 약화돼 풍력 발전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한 데다 러시아의 LNG(액화천연가스) 공급 제한 여파로 전력난을 겪으면서 원전 필요성이 한층 높아졌다. 2050년 탄소중립을 목표로 하는 EU는 에너지 전환기에 탄소 배출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원전에 대한 민간 투자를 이끌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EU뿐 아니라 세계 각국은 최근 원전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중국 정부는 2035년까지 4400억달러(약 518조원)를 투입해 최고 150기 원자로를 추가 건설할 계획이다. 150기는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국가가 지난 35년간 세운 원전 수보다 많다. 미국도 원전을 청정에너지 전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조 바이든 정부는 차세대 원자로 기술과 소형모듈원전(SMR) 개발에 향후 7년간 32억달러(약 3조7000억원)를 투입할 예정이다. SMR은 하나의 용기에 원자로와 증기 발생기, 냉각재 펌프, 가압기 등 주요 기기를 모두 담은 일체형 원자로다. 건설 비용이 기존 원전보다 저렴한 데다 소형이라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와 연계해 분산형 원전을 구축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전력 부족으로 에너지 위기에 처한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도 잇따라 원전 건설로 방향을 틀었다. 탈원전을 선언했던 프랑스는 최근 10억유로(약 1조4000억원)를 들여 SMR 개발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20년 넘게 원전 건설을 중단했던 영국 역시 2050년까지 약 45조원을 투자해 SMR 16기를 건설하기로 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2050년까지 전 세계에 최대 1000기 소형 원전이 건설되고 시장 규모만 400조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 탈원전 정책 고수
▷전기요금 인상 등 부작용 우려
EU를 비롯한 세계 주요국이 원전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서면서 한국 탈원전 정책에도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쏠린다.
환경부는 지난해 말 한국형 녹색분류체계 즉 ‘K택소노미’에서 원전을 제외시켰다. 이는 정부의 신재생에너지 정책에 따른 것이다. 대통령 직속 탄소중립위원회는 2020년 29%였던 원전 발전 비중을 2050년 6~7%로 낮추고, 6.6% 수준인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율을 2030년 30.2%, 2050년 60~70%로 대폭 높이기로 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신한울 3, 4호기, 천지 1, 2호기 등 원전 건설을 사실상 백지화했다. 현재 가동 중인 원전은 24기로 향후 추가 준공될 원전은 신한울 1, 2호기와 신고리 5, 6호기 등 4기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기존 원전의 설계 수명을 연장하지 않는 방식으로 2034년에는 17기로 줄인다.
이를 두고 에너지업계에서는 EU처럼 더 늦기 전에 원전을 ‘K택소노미’에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이 쏟아진다. 원전을 녹색분류체계에서 제외하면 신규 원전 건설, 차세대 원전 기술 투자 동력이 상실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두산중공업을 비롯한 국내 원전업체들의 설계, 시공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국내에서는 사실상 신규 사업이 막히면서 해외 시장만 쳐다보는 실정이다. 한국원자력산업협회에 따르면 탈원전 이전인 2016년 5조5000억원 수준이었던 국내 원자력 공급업체 매출은 2019년 3조9300억원으로 30%가량 감소했다.
유환익 전국경제인연합회 산업본부장은 “EU의 최종안은 탄소 감축 목표 달성을 위해 원자력 활용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미국, 중국에 이어 EU도 원전을 탄소중립 핵심 수단으로 삼는 만큼 우리도 원전을 녹색분류체계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환경부 입장은 여전히 애매모호하다. 한정애 환경부 장관은 “원전과 녹색분류체계에 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고 밝힐 뿐 실제 정책에 변화를 줄지는 미지수다.
세계 각국이 탄소중립 목표 실현 과정에서 원전 필요성을 강조하는 만큼 우리도 탈원전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 한목소리다. 무리하게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려다 전력난 등 부작용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 정책 합리화를 추구하는 교수 협의회(에교협)’는 최근 토론회를 열고 정부 탈원전 정책으로 한국전력 부채가 지난 5년간 10조원 넘게 늘었다고 분석했다. 값싼 에너지원인 원자력 발전을 줄이고 상대적으로 비싼 LNG 발전을 늘린 탓이다. 심형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지난 5년간 한국전력의 부채 증가분 34조4000억원 가운데 10조2000억원은 탈원전 정책에 따른 것이다. 원전 발전 비중을 2016년처럼 30%로 유지했다면 한전이 10조원 손실을 보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탈원전 정책으로 국내 원자력 발전 비중은 2016년 30%에서 2018년 23.4%까지 떨어진 상태다. 한전의 발전 비용 증가는 곧장 전기요금 인상으로 이어진다. 에교협은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철회하지 않으면 2030년 전기요금이 2020년 대비 39~44%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이제 관심은 여야 대선 후보에 쏠린다. 오는 3월 대선 결과에 따라 원전 정책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탈원전 정책 폐기’를 공약으로 앞세운 반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현재 건설 중인 원전은 예정대로 사용하되 신규 원전은 짓지 않는 ‘감(減)원전’ 정책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글로벌 에너지 위기로 에너지 가격 급등 우려가 커진 만큼 우리도 대책이 절실하다. 에너지 해외 의존도, 대체 에너지원 확보 현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원자력을 녹색분류체계에 포함하는 등 충격을 완화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민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46호 (2022.02.16~2022.02.22일자) 기사입니다]
출처 : 매일경제
기사원문 : https://www.mk.co.kr/news/business/view/2022/02/128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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