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가수 이야기
때로는 과거가 지금이다. 그때 그 사람이 지금 내 가슴에 있으면 지난 과거도 살아있는 현재다.
발칸 반도의 작은 나라 불가리아는 역사적으로 존재감을 찾기가 어려웠다. 왼편에는 오스트리아ㆍ헝가리 제국으로 재편되는 천년 왕국 합스부르크 왕가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소비에트 제국으로 변모하는 대국 러시아가 있었다. 남쪽에는 지중해로 향하는 길목을 막은 오스만 투르크가 항시 위협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했고, 공산주의 압제에 시민들은 숨이 막혀 왔다.
외교관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진정한 자유와 새로운 희망을 찾아 프랑스로 향했다. 아버지를 따라 망명한 어린 나이의 여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불가리아 가요가 아닌 프랑스어로 부르는 샹송이어야 했다. 생존을 위해 프랑스어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약간은 어설픈 발음이 비치지만, 노래하는 젊은 이방인 여자가수의 마음은 어설프지 않았다.
“마리짜 그건 나의 강. 세느강이 그대의 것이듯. 하지만 나의 아버지 외에 누가 그것을 기억하리…” 실비 바르땅은 자신 있게 가사를 이어갔다. “내 나이 막 10살이었을 때, 나에겐 아무것도 없었지. 그 흔한 인형 하나도 없었고. 낮은 소리로 흥얼대는 후렴구절 밖에는. 라 라 라 랄라라랄라 라라라…”
처연함을 감출 수 없는 무명 여가수의 얼굴에서 <마리짜 강변의 추억>의 후렴은 더욱 경묘하게 뿜어지고 있었다. 절박한 심정을 공중에 뿌려 버리듯이 후렴을 빠르게, 힘차게, 더욱 빠르게 반복했다. 그녀는 자신감을 표출했다. 이국땅, 낯선 도시 파리에서 스스로를 찾았다. 더 이상 이방인일 필요가 없었다. 변방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 마을에서 온 보나파르트가 그 역겨운 텃세와 멸시를 헤치고 프랑스의 주인이 되었듯이, 마리짜 강변 출신의 실비 바르땅도 고적한 회색지대 세느 강변에서 굳건하게 서기 시작했다. 혼자뿐이었고 혼자여도 충분했다.
지울 수 없는 프랑스의 찬연한 영광은 나폴레옹이 만들었고, 쉽게 사라지지 않을 샹송의 메아리는 이방인 실비 바르땅이 확산시켰다. 1970년대부터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간 샹송의 울려 퍼짐 뒤에 그녀가 서 있었다. 세상의 지평선을 아는 프랑스는 외부로부터의 발길을 받아들였다. 이민자의 설움도, 망명자의 고독도 포용했다. 국법(國法)의 한켠에 검푸른 날의 단두대도 있었지만, 이방인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 주었다. 삶의 의지와 냉정한 정열을 품고 승리의 인생을 만들 준비가 된 외지인들에게 폐쇄의 문지방을 낮추어 주었다. 불가리아 시골 출신의 실비 바르땅(Sylvie Vardan), 그녀는 외연을 넓히며 한 걸음씩 승리의 길을 걸어왔다. 가슴 깊이 숨어 있는 처절함을 가벼운 리듬으로 전환하며 노래해 온 그녀는 인생의 승자였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경쾌한 리듬으로 흘러나오는 노래 한 곡이 있다. ‘훼리스 나비다(Feliz Navidad)’. 귀에 익숙한 가요다. 그 노래를 부른 수많은 가수 중에 ‘호세 펠리치아노’가 있다. 그는 화사한 노래도 많이 부른다. 앞을 못 보지만 세상을 보고 있다. 인생을 누구보다 잘 읽고 있다. 부드럽게 기타까지 치면서 노래한다.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약자인 것이다.
최승현 경기도 국제관계대사
출처 : 경기일보(http://www.kyeonggi.com)
기사원문 : http://www.kyeonggi.com/news/articleView.html?idxno=2214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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