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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文化/침묵의 시간

십자가가 제거된 교회

by KBEP 2015. 3. 31.

[십자가가 제거된 교회]

 

김동규

 

언제부턴가 교회내의 모임이나 기독교라는 이름 하에 만들어진 교회 밖에서의 각종 모임들에서 정작십자가’, ‘십자가의 피또는를 이야기하면 그 모임의 분위기가 갑자기 경직되거나 싸늘해지고 막상 이를 말한 당사자는 이상한 믿음의 소유자로 비춰지거나 때로는 그 소속된 모임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기 십상인 상황으로까지 교회가 변해버렸다.

 

당연히 교회나 기독교라는 이름하의 모든 모임들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야만 될 십자가가 이제는 그러한 모임들의 한 켠 구석으로 밀려나 있거나, 설령 강대상 한 가운데 붙어있다고 할지언정 그것은 교회이기에 의례히 갖추어야 될 정도로서의 하나의 장식이나 악세사리 수준으로만 취급 될 뿐십자가 만이 최고의 가치이고십자가 외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성도가 바라보고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이 없음을 교회가 가르쳐야만 됨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교회들이 먼저 나서서 세상에서 추구하는 이런 저런 류의 복들에 추가하여십자가 도양념으로 그저 살짝 곁들여 있는 것으로 간주하게끔, 그래서 그 십자가가 성도가 믿는 믿음의 처음이요 전부며 마지막이 아니라 믿음의 한 부분인양 인식하게 되는 상황으로까지 와 있는 것이다.

 

어려서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부모님을 따라 다녔던 60-70년대 교회의 설교에서든 부흥 사경회에서는 그나마 내 귓전을 자주 자주 스쳐 지나갔던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그 분의 피로 인한 죄인 구원의 전적인 은혜만을 외쳐대던 부흥사나 목사님들의 음성들을 이제는 점점 듣기가 쉽지만은 않은, 교회 뒤 켠의 창고에 처박혀 먼지만 허옇게 덮여버린 한낱 옛 신앙인들의 골동품 십자가로만 취급 당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전혀 인식하지를 못하고 있는 사이, 세상의 사고인 자본주의/물량주의에 어느덧 자연스럽게 동화되고 물들어버린 세속화된 교회, 그래서 이제는 오히려 교회가 서로 앞다투어 세상이 갈망하는 매력적인 것들과 인간의 욕망거리들을 미리 찾아 내어놓으며 교회가 이러한 세상의 요구들을 채워주고 해결해주는 전지전능한 신을 모신 장소라며 세상에 대해 달콤한 나래 짓을 하고 있음은 이 시대의 교회들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중병에 걸려 있음을 십자가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이를 바라보고 있는 참 성도라면 수긍하는 바 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으로 성도가 이 땅에서 이미 갖게 된 복의 전부이자 마지막 임을 교회가 선포하기 보다는 이 타락된 세상에서 아직도 받게 될 복, 그것도 세상 사고 방식에서 추구하는 수많은 세상의 복들을 나열해가며 그것이 마치 하나님이 채워주는 복인 냥 둔갑시켜 선포 함으로서, 십자가를 따름이 이 땅을 사는 성도의 좁은 길이요 주님과 함께 죽어야만 되는 길임을 언급하기 보다는 세상에서의 출세와 육신의 건강과 자녀들의 명문교 진학 등등 세상이 추구하는 안목에 정욕과 육신에 정욕과 이생에 자랑 거리들로 채워짐이 마치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은 성공한 신자의 모습인양 둔갑시켜 놓음은 세속/물질 만능 시대에 동화된 교회가 세상이 듣기 싫어하고 거북스러워 하며 오히려 이를 꺼려하여 적극적으로 거부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십자가를 슬며시 뒤로 돌려 놓은 채로 세상이 추구하는 이 땅의 복들로 맞바꾸어 놓음으로써 그저 겉모습만 신자인 세속적 교인만을 양산해 감으로서 교인 수만을 늘려가고 있는, 겉모습은 부한 것 같으나 실상은 기름기만 잔뜩 끼어 아무 쓸데없이 비대해져 버린 교회, 수천에서 수만 명 뿐만이 아니라 수십만 명이 모이는 거대한 집단, 공룡의 화석처럼 굳어져버린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아 힘있는 교회요 좋은 교회임을 힘만을 추구하며 최상의 가치로 삼고 있는 세상에다가 오늘의 교회들이 앞다투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창세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사단의 일관된 계략은 오직 하나, 성도에게 있는 믿음의 토대인 십자가 만을 훼방하는 것에만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될 것이다.

 

사단의 관심은 교회 밖의 다른 종교들이나 불신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늘 교회 안의 성도들과 그 모임들 가운데 성도들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인간 죄성의 근본을 부추기며 교묘하게 활동하고 있기에교회 안에 있음이 성도가 안전한 곳이 아니요 오히려 교회 안에 있으므로 사단이 호시탐탐 성도들에 믿음의 근본인 십자가에서 거저 주시는 주님의 의로부터 멀어지게끔 훼방하는 것이기에 성도는 항상 우리들의 신앙이 어떠한 터 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지를 날마다 더욱 민감하게 점검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주님의 십자가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사단은 오늘도 여전히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서 성공했던 방식으로 성도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십자가를 알고 거룩해진 너, 네 자신 스스로 이제 선악을 분별 할 수 있는 자가 되었으니 너에 선함을 마음껏 내놓으라고…… 주님 십자가의 피로인한 그 분의 의를 인간의 의로 맞바꾸어 놓음으로써 십자가의 공로(주님의 의)를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되게끔 인간 선함에서의 자기 의와 교묘히 바꾸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가 세상이 인정하는 선한(?) 싸움들을 분주히 하게 함으로서 급기야는 믿음의 근본인 십자가를 더 이상 찾을 필요성을 못 갖도록 그저 한낱 장식화된 십자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발생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의 발단은 세상이 요구하는 선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거부 할 수밖에 없는 십자가를 세상과 타협한 교회들이 자진해서 치워 놓았기 때문이다.

 

년간 한번씩 찾아오는 성탄절의 장식용 크리스마스 추리와도 같이 하얗게 먼지 낀 십자가를 고난주간에나 꺼내어 장식하고선 다시 선반에 올려놓는 십자가가 오늘날의 교회에서 취급 당하고 있는 십자가인 것이다.

 

이제 그 행사 철인 고난주간이 다시 다가왔다.

 

이번만큼은 꺼내놓은 십자가를 다시 선반 위로 되돌려 놓지를 말자.

매주마다 우리들 예배의 중심에 십자가를 세워두자.

매일 성도의 삶 가운데 주님의 십자가를 꽂아두자.

시간 시간 주님 십자가의 은혜가 성도의 삶 가운데 덮침으로써 그들을 있게 하신 그 분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자.

 

그것이 이미 복 받은 자이며 산 위에서 말씀하신 주님에 팔복의 진정한 의미가 이 땅에 온전히 드러나는 것이다.

 

창세전에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그 십자가를 통해서

 

…그들 심령이 가난해질 수밖에 없도록,

…그들 마음에 애통이 있을 수밖에 없도록,

…그들 마음이 온유해질 수밖에 없도록,

…그들이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밖에 없도록,

…그들이 긍휼히 여길 수밖에 없도록,

…그들 마음이 청결 할 수밖에 없도록,

…그들이 화평케 할 수밖에 없도록,

…오직 주님의 의를 위해서 그들이 세상에서 핍박 받을 수밖에 없도록...,

 

오늘도 십자가지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성도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그분만의 사역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1: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