Майк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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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文化/침묵의 시간

문화신학과 문화선교

KBEP 2008. 5. 29. 13:06

문화신학과 문화선교


1. 문화신학이란 무엇인가

문화신학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한 분과로서 문화와 그리스도교 신앙과의 관계, 더 넓게는 문화와 종교와의 상관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다룬다. 문화와 종교와의 관계는 종교학적으로는 성과 속의 변증법적인 상관관계가 관련되고 신학적으로는 문화이념에 대한 신학적 비평,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착화론, 그리스도교 신앙의 문화 예술적 표현과 상징문제, 그리고 다양한 종교간의 대화와 협동문제가 내포된다. 문화는 정치사회문화, 예술문화, 기술과학문화, 종교문화 장르에서 각각 초월적 차원 곧 종교적 신학적 문제와 접목하며 관계하면서 문화신학의 소재를 산출한다.
   문화신학의 개념과 관제가 위와 같이 매우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이유는 문화개념 그 자체의 포괄성과 다양성에서 유래한다. 문화란 인간생명 현상에서 나타나는 가치 창조적인 행위 전체와 관련된다. 문화는 가치와 의미를 창조하면서 한 공동체의 자기정체성과 일체성을 견지하게 하는 삶의 의미 연관 구조 그 자체이며 하나의 유기체적 생명체와 같다. 살아 있는 문화는 사회성과 전통을 매개로 하여 차세대에서 문화적 계승과 새로운 가치창조를 하면서 끊임없는 "지평융합"과정을 거치며 상호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인간은 문화라고 하는 제2의 자연환경과 모태 속에서 인간으로서 조성되어 가기 때문에  인간은 문화적 존재이다.


2. 문화와 종교간의 변증법적 관계

문화는 종교가 아니며 종교는 문화가 아니다. 각각은 자기의 독자적인 기능과 영역과 차원이 있다. 문화는 인간생명의 자기 창조적 운동과 관계된다면, 종교는 인간생명의 자기초월적 운동과 관계된다. 새로운 가치 창조운동으로서의 인간의 문화운동은 수평적 차원이라면, 인간의 자기초월운동으로서 종교적 행위는 수직적 관계에서의 운동이다.
   문화와 종교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분리 할 수는 없다. 성과 속은 구별되어야 하지만 분리 할수 없음과 같다. 왜냐하면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려는 인간의 의미추구, 가치창조의 행위가 그 궁극적 단계에 가서는 의미와 가치의 존재론적 뿌리와  지반이 되는 "궁극적 실재" 곧 형이상학적인  종교적 실재와 관련되고  접촉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굳어지고 화석화된 종교에서보다 어떤 경우에는 문화활동과 예술적 행위 안에서 인간은 초월을 경험하고 또 표현한다. 문화가 궁극적인 것의 담지자가 되며 문화의 각 장르는 종교적 계시의 훌륭한 매개체, 담지자가 된다.
   문화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종교란 문화의 실체(substance)이며, 문화란 종교의 형태(form) 이다" 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창하였다. 종교는 종교로서의 문화와 구별되는 특별한 전문기능을 지니지만 본질적으로 종교란 인간정신기능의 한 특수한 영역이 아니고 인간의 정신적 삶 전체의 "깊이의 차원"이기 때문에 문화적 삶의 현상과 활동 전 영역과 종교신앙은 관련된다. 위의 문화신학 명제를 받아드린다면 문화사와 종교사는 구별되면서도 분리 할수 없게 된다. 문화사의 깊이의 차원에는 그 문화를 창조해가고 전승해 가는 문화공동체의 궁극적 관심 곧 그들의 종교적 신념과 초월경험과 가치 지향성이 그 안에 육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틸리히의 문화신학은 모든 시대의 공동체가 지향하는 문화이념과 가치 속에 내재해 있는 "궁극적 관심"을 복음의 빛에서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성찰함으로서 문화이념이 지니는 생명 창조적 기능과 생명 파괴적 마성적 기능을 분별해 내는 이념 비평적 과제를 지닌다. 19세기 서구 부르조아 시민종교와 자본주의 문화가 지니고 있었던 자기만족적인 문화이념, 근대국가주의가 지니고 있는 권력의 우상화, 볼쉐비키 사회주의 혁명이론과 공산주의 사회가 빠져드는 집단주의와 폭력혁명의 이론, 모더니즘이 전제하고 있는 합리성의 독단주의와 발전론적 역사주의 독단성, 근본주의적 종교집단과 열광주의 신앙집단이 공유하는  마성적 성격 등등을 문화신학은 그리스도교 복음의 빛 안에서 비판적으로 그 본질을 밝힌다. 결국 문화신학은 그리스도교 복음이 지향하는 정의, 자유, 평화가 육화된 "하나님의 나라"라는 궁극적 관심을 가지고 이 역사 속의 "준 궁극적 문화이념"들을 비판적으로 검증하여 인간을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 속에서 살도록 하는 우상 파괴적 , 예언자적 기능, 모성적 치유를 본질로 하는 제사장의 기능, 놀이와 유머를 즐길 줄 아는 현자의 기능을 회복시키어 복음에 봉사한다.
  리챠드 니버(Richard Niebuhr)는 그의 명저 <그리스도와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교와 서구문화와의 관계방식을 다섯 가지 모델로 분류하였다: 문화와 적대관계의 그리스도교, 문화를 지배하는 그리스도교, 문화와 역설적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그리스도교, 문화 이념으로 기능하는 그리스도교, 그리고 문화를 변혁해 가는 그리스도교 이상 다섯 가지 모델이 그것이다. 각각의 모델은 그리스도교 교회의 삶의 자리를 나타내고 그것에 반응하는 다양한 형태들이다. 문화신학이 그리스도교의 화육 신앙과  하나님 나라를  두 축으로 삼는 복음의 역동적 운동에 대한 담론이라면 리챠드 니버의 다섯 번 째 모델이 바람직 스럽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다섯 번 째 모델이 이상적 모델이지만, 그리스도교 교회가 구체적으로 처한 문화-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와 문화의 관계방식의 설정은 매우 탄력적이고 가변적임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3. 문화신학과 예술문화

문화신학의 첫 번째 영역이 정치 사회적 이념비판 영역, 곧 역사적 삶의 현실 속에서 인간해방의 관심에서 찾아진다면, 두 번째 문화신학의 과제와 관심은 예술문화 영역에서 발생한다. 종교와 예술이, 신학과 미학이, 만나면서 서로를 조명하고 풍요롭게 한다. 종교와 예술은 그 기원을 함께 한다는 것은 문화사의 첫 장에 나오는 상식이 되었다. 그 뒤 종교와 예술이 분화되고 전문화됨으로서 각각은 더욱 왜소하고 가난하게 되었다. 현대 문화신학에 의하면 예술은 신학적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전달하는 단순한 도구적 표현매체가 아니라, 그것자체가 메시지가 된다. 예술과 종교의 친화성은 상징성, 창조성, 비합리성, 직관성, 신명성, 놀이성, 제축성 등에서 매우 통하는 점이 많다.
  첫째, 종교와 예술은 상징언어를 통하여 그 전하고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상징(symbol)은 기호(sign)와 다르다. 상징은 자기자신을 넘어서서 무엇을 가리키면서, 그가 가리키고 있는 실재의 능력과 의미에 참여하고 있다. 교통신호등의 색깔과 교통표지판의 그림은  기호이지만, 연꽃이나 십자가나 어린양이나 무궁화 꽃은 상징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상징파괴는 두 차례의 큰 역사적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그 첫째는 기원 726년 동로마 황제 레오 3세가  일체의 성상(聖像)숭배 금지령을 내린 사건과 관련된다. 성상 파괴령(Iconoclasm)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명령은 교회 안에서와 신자들의 가정에서 그리스도, 성모, 순교자, 성자의 상(像)을 그림이나 조각형태의 상징물로 만들어 경배하는 경건 행위나 숭배행위를 금지시킨 명령이다. 이 성상금지령은 843년 테오도라에 의해 철회되었다. 둘째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성서만의 원리"를 강조함으로서 성상숭배를 비롯한 일체의 상징적 종교예술의 표현과 그 기능을 비판하고 축소화하였다. 복음의 단순성과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본 의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개신교는 상징신학의 약화를 초래하여 신앙이 무의식과 의식을 통섭하는 전일적 인간의 깊이와 관련되지 못하고 의식의 차원으로 단층화 되었다. 상징은 인간의 시각적 행위를 통하여 본질직관에 이르며,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는 역설과 비대칭적 시간의 동시성을 체험하게 한다. 신학이 말하려는 실재와 그 진리성은 모두 상징적이다. 예술은 상징이다. 이점에서 문화신학은 상징이 신학과 종교적 예배의식에서 갖는 의미와 그 중요성을 다시 발견하고 재 강조한다. 상징은 표피적 형식이나 형태를 뚫고 존재와 정신의 깊이를 현시(manifestation)한다. 진지한 예술가는 기존적인 종교체계와 제도에 대하여 반종교적일 수 있어도 결코 비종교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예술가는 그의 예술양식을 통하여 삶의 궁극적 질문과 의미를 묻고 그 대답에 예술적 표현을 통해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틸리히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위대한 프로테스탄트의 회화"라고 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으며 예술 특히 미술에서의 초현실주의나 추상적 표현주의를 신학의 계시론과의 상응성에서 해명하는 그의 논리도 상징론에 대한 그의 문화신학적 이해에 기인한다.
   둘째, 종교와 예술은 비합리적 직관성, 역설성에서 서로 통하는 면을 지니고 있다. 특히 근대주의 정신이랄 수 있는 데까르뜨-라이프니치-볼프의 인식론과 실재론에서 진리인식 방법과 진리와 비진리의 판별적 규범으로 제시되는 "명석하고도 판명한 인식논리"는 결국 수학적 논리와  경험적 합리주의 이외에 모든 생의 충만한 신비를 거세하여 버렸다. 예술과 종교는 이에 저항한다. 예술영역과 종교체험은 반이성적일 수는 없어도 얼마든지 비이성적일 수 있다. 아니 도리혀 삶의 깊이의 차원과 생명과 존재의 역설적 일치경험은  합리주의 독단론을 가지고서는 파지되지 않으며 이해되지도 않는다. 마르부르크 대학의 오토교수는 그의 명저 <성스러움의 의미, Das Heilige> 속에서 종교체험의 본질을 성스럽고 신비한 누미노제적인 것의 체험으로 보고, 인간에게 한없는 "떨리는 경외감"과 "매혹적인 황홀감"이라는 이율배반적이 감정을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성스러운 것에 대면하는 인간의 종교체험을 현상학적으로  서술하였다. 그가 강조하려고 했던 바는 종교가 합리성이나 도덕성의 범주에 유폐되고 제약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열하면서 돌파시키는 역설적 일치의 체험, 직관적 신비체험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빛과 로고스적인 것의  단일극성이 아니라 어둠과 디오니소스적인 것까지를 동시에 포용하며 그것을 통해서도 신성을 계시하시는 양극성적인 것의 역설적 통일과 대치를 통한 조화를 말하려고 했다. 그 점에서 문화신학은 예술과  종교를 매개시키려 한다.
  셋째, 종교와 예술,  신학과 미학은 삶의 놀이성, 제축성, 신명성을 공유하면서 문화신학이라는 공동광장에서 만난다. 종교와 예술에서 놀이성, 제축성, 신명성을 다시 강조하는 대표적 문화신학자는 샘 킨(Sam Keen), 하비 콕스(Harvey Cox), 율겐 몰트만(Jurgen Moltmann), 죌레(Zoell), 한국의 신학자 현영학, 유동식 등이 있다. 이들의 공통요소는 세계관적으로 근대주의를 넘어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의 반획일주의 이다. 근대적 인간상의 특징인 공작인(homo faber) 대신에 축제인(homo festivus), 경탄인(homo admirans), 춤추고 환상을 꿈꾸는 인간(homo ludens)의 복권을 강조한다. 근세 역사가 일방적이 역사주의에 몰두하였고 우주와 만물을 직선적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여행같이 선형적 사고에 집착하게 해서 비선형적 사고를 망실시켰으며, 정치적 불의와 악에 대한 인간의 해방모티브를 추구하느라고 증오와 열광주의에로 인간을 방치시켰다. 자연과 함께 숨쉬는 인간을 잃어버리고 도시인의 익명성, 유동성, 능률성, 경제성에 밝은 인간을 찬양하였다. 이러한 해방신학, 정치신학, 희망의 신학은 그 일방성의 위험을 감지하고 "놀이의 신학", "축제의 신학"을 되찾아 상호 보완하여 보다 온전한 통전성에 이르고자 한다.
  축제성과 환상은  인간으로 하여금 현재의 세계 현실 속에 있는 불의함과 역사악을 외면하고 현실 도피적인 환상적 놀이에로 이성을 몰입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해학과 놀이를 통하여 현재를 비판하고 초월한다. 환상과 미래의 희망은 과거와 현재를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환상과 희망 속에서 현재를 비판하고 미래를 선취한다. 놀이신학과 축제신학은 하비콕스의 <세속도시>와 <바보들의 축제>가 암시하듯이 , 그리고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과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이 암시하듯이 정치신학과 해방신학의 참여동기를 버리지 않고 성숙시킨다. 역사범주 일변도에로 경도 되었던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발상법을 새로운 자연신학으로 보완할 것을 주장한다. 참여의 원리 못지 않게 동일성의 원리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창조행위 그 자체를 지나친 목적의식이나, 도덕적 책임의식이나, 존재론적 필연성 속에서 보지 않고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자유와 사랑의 충만한 놀이행위로서 재해석한다. 전통적인 신학적 용어로서 표현하면 하나님의 세계창조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보시기에 좋으시니까" 창조행위를 하였으며, 그 하나님의 창조적 기쁨과 새로움의 경험과 영광에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초청하고 함께 춤추자고 부르신다. 하나님의 창조행위가 일어나고 있는 우주자연에는 현대 인간들의 생산성 증대를 목적으로 하는 노동의 개념이나, 목적지향성의 획일적 방향성이 지배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움의 출현, 아름다움과 조화로움, 거룩한 생명의 낭비, 고통을 동반하는 창조의 기쁨, 그리고 놀이를 통한 즐거움과 만족이 있다. 현대문화신학은 이와 같은 현대 예술 및 미학과의 대화를 통하여 새로운 문화신학적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4. 문화신학과 종교문화와의 관계

현대 문화신학은 그 중요한 또 하나의 과제로서 종교현상의 다원성에 대한 신학적 해명을 그 과제로 갖는다. 종교신학은 넓은 의미의 문화신학의 한 장르로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다른 비기독교 종교 및 타종교 문화와의 관계문제를 추구한다. 그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학의 분명한 각성은 20세기 후반 1960년대 이 후의 일이다. 로마 카토릭 교회는 제 2 바티칸공의회(1962-1965)이후, 개신교는 세계교회협의회 나이로비 회의 이후(1975) 일이다. 종교간의 대화 및 만남의 태도를 가르치는 카톨릭의 제 2 바티칸공의회 문서로서는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1965)과 "종교자유에 관한 선언"(1965)이 있다. 개신교 세계교회 협의회입장으로서는 "종교간의 대화지침서"(1979)와 "바아르 선언문"(1990)이 있다. 그리스도교와 비그리스도교 종교들과의 대화 및 협동에 관한 중교 신학적 입장은 크게 배타주의입장, 포용주의적 입장, 그리고 다원주의적 입장으로 대별된다.
  배타주의적 입장이란 일종의 종교문화 정복설과 같은 입장으로서 그리스도교 만이 참 진리의 종교이며, 계시적 종교이며, 타종교 및 타종교에 기초한 이방문화는 이교이며 우상종교라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리스도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성경만이 오직 유일한 구원진리가 계시된 경전이라고 믿는다. 종교간의 대화 자체가 무의미하며 불신앙적 태도라고 생각하므로 대화 자체가 터부시되고 오로지 종교적 승리주의 멘탈리티가 지배한다. 이러한 극단의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의 입장은 그리스도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회교 근본주의자들도 있기 때문에 배타주의는 종교간의 전쟁과 종교문화갈등으로 이어질 위험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포용주의 입장은  그리스도교 구원의 도리를 보다 온전한 구원진리라고 고백하면서  그리스도교 이전 단계의 인류 종교의 실재성과 그 가치를 인정하고, 그들의 윤리적 영적 가치와 공헌을 수용한다는 입장이다. 포용주의 입장을 일명 성취설 이라고 보는 이유는 그리스도교 구원진리의 우월성과 온전성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포용주의 입장은 하나님의 구원경륜과 말씀의 역사가 시공을 넘어 우주적으로 보편적으로 현존하고 역사하여 왔다고 믿는다.  진리의 말씀과 생명의 빛으로서의 로고스 그리스도는 역사적 그리스도교의 전교(傳敎) 이전에도 이미 모든 인간문화와 종교적 진리 안에 현존해 왔고 역사 해 왔기 때문에 명시적 그리스도인이 아닐 지라도 모든 사람은 "익명적 그리스도교인" 이라고 칼 라너(Karl Rahner)는 주장하였다. 포용주의적 입장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궁극성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적 견해를 반영하는 입장이지만, 종교 신학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교의 우월성, 규범성,절대성을 전제로 하는 종교 문화 제국주의적 잔재가 남아있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다원주의적 입장은 세계 안에 숨쉬는 모든 위대한 세계종교들은 모두 하나님의 시대경륜과 인류구원을 위해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고 인류의 문화-역사적 상황 속에서 구체적으로 반응한  다양한 유형의 구원 패러다임들이라고 해석하는 입장이다. 모든 진지한 종교들은 그들 나름대로 계시경험과 구원경험을 담지하고 전승해 오기 떄문에 , 그리스도교만이 계시종교이고 다른 종교들은 이성종교 또는 자연종교, 또는 도덕종교라고 규정하는 19세기 종교사학파들과 정통보수주의 문화신학 입장을 비판한다. 다원주의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진리체계의 우월성 주장이 포스트 모던 사회의 가치의 다양성,  구원패러다임의 다양성, 상징체계와 윤리체계의 다양성을 손상시킨다고 본다. 그러나 다원주의 입장은 특수성이 배제된 종교적 혼합주의나 무책임한 종교적 상대주의와는 엄밀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다원주의의 진정한 의도는 신앙의 자기정체성과 개방성이 동시에 숨쉬는 종교신학을 추구한다. 다원주의 입장의 대표적인 신학자는 카톨릭의 라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와 개신교의 죤 힉(John Hick)을 들 수 있다.    

5. 문화신학과 토착화론

토착화란 복음이 자기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자기를 부정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역사-문화적 현실 속에 육화해 들어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현실화 시켜 가는 역동적 과정을 말한다. 토착화란 왜래 종교가 피선교사회의 문화역사 전통 속에 접목되어 왜래종교 로서의 생소감을 극복하고 토착문화현실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적 해석학의 표현을 빌린다면 기존전통의 종교문화 구성원이 지닌 삶의 지평과 전래된 외래 종교의 삶의 지평이 "지평융합"을 이루어 가는 역동적 과정이 토착화이다. 한국 카톨릭 교회사에서  초기 60년의 교회초창기에 매우 활발한 자생적 토착화 신학, 토착화 신앙 운동이 전개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벽의 "천주공경가"(1779), 정약종의 "주교요지"(1795), 최초의 한국 그리스도인의 변증서 랄 수 있는 정하상의 "상제상서"(1839)등은 모두 한국 카톨릭 신앙의 토착화 작업의 흔적들이다. 그 뒤 120년간은 서구 전통신학의 소개와 수용에 거의 시간을 보냈고 1860년대 제 2 바티칸공의회 이후, 한국 카톨릭교회는 "한국 카톨릭 사목지침서", "상제례토착화 시론"등의 중요한 문서들을 출판하였다. 토착화과정은 문화-종교적 형태를 통해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 정치적 참여를 통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 한국인의 심성 속에 더욱 현실적으로 육화되어 가는데, 1970년대 이후 한국 카톨릭 정의구현 사제단의 활동이나 카톨릭 농민회 등에서 보는바 같은 노동자 농민계층과의 연대적 활동을 통해 카톨릭 신앙은 한국인의 심령 안에 육화되어 갔다.
  한국 개신교의 토착화론은 최병헌, 유영모, 윤성범, 김하태, 유동식등 주로 감리교 신학자들에 의하여 많은 공헌과 학술적 저작물을 나타내었다. 윤성범의 "誠의 신학", 유동식의 "한국 무교의 역사와 구조"(1975) 및 "풍류도와 한국신학"(1992), 김하태의 "동서철학의 만남"(1985)은 서남동과 안병무의 "민중신학의 탐구"(1982)등은 한국 개신교 토착신학의  결실물이다. 토착화론과 토착화과정은 이론 신학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예배양식, 교회당의 건축 양식, 교회력, 교회음악과 미술 연극 등의 문화적 매체들을 통하여서도 이루어져 간다. 유교적 제사의식을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재해석하여 재수용 하는 문제, 추석을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로 삼는 일, 사제들과 성직자들의 의복을 한국적 양식으로 개조하는 일, 교회당의 건축양식에 한국적 건축미를 도입하는 일, 한국적 가락과 한국화의 기법을 통하여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표현하는 일등이 매우 활발히 진행되어가고 있다. 최근에 멀티미디어 시대에 부응하여 카톨릭의 평화방송, 개신교의 기독교 방송 등 기존 전파방송매체와 곁들어 케이블 텔레비젼 영상매체를 통한 문화선교의 시도는 앞으로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