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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文化/침묵의 시간

[스크랩] 사랑은 사랑을 선택한다.

by KBEP 2011. 1. 7.

 

 

 

 

 

사랑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사랑이 사랑하는 것이다.  

 

부제 : 사랑은 사랑을 선택한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사랑스러워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사랑이란 대상이 어떠하든(어떤 상태이든) 상관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상대가 어떤 상태이든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사랑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사랑이 사랑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데 혹은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사랑스럽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내 안에 그 사람을 향한, 그 사람의 몫의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스럽다.' 라는 것은 순전히 상대적인 개념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내가 A라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해서 A라는 사람이 사랑스럽지 않다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절대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고슴도치는 우리가 볼 때는 전혀 사랑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혐오스럽기(사랑스런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혐오스럽다는 기준이 무언인고 하면 바로 '나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사랑스럽지 않고 혐오스럽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고, 사랑스럽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못생긴 고슴도치일지라도 그 고슴도치의 엄마 고슴도치에겐 너무나 너무나 사랑스러운 자식이다. 그래서 먹이고, 보호하고, 양육한다.

 

영화 '공공의 적'에는 부모를 살해하는 나쁜놈이 나온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아들의 손에 죽어가는 순간에도 아들이 사형에 처하게 하지 않기 위해 아들이 범인이라는 증거를 없애며(아들의 부러진 손톱을 삼키며) 죽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누가봐도 천인공노할 무자비한 살인범일지라도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의 어머니만은 그 아들의 손에 죽는 순간까지 아들을 사랑한다.

왜 그렇게 사랑하는가?

 

 

고슴도치를 혐오스럽게 보는것이 맞는가? 아니면 사랑스럽게 보는 것이 맞는가?

살인범을 죽여야한다고 보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살인범을 살려야 한다고 보는 것이 맞는가?

 

둘다 맞다.

 

그러나 둘다 맞지만 사랑은 그 둘 중에 사랑을 선택한다!

 

 

"사랑은 사랑을 선택한다..."

 

 

고슴도치와 살인범은 정상적으로 볼 때 사랑할 수 없는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그 부모일지라도 이성적, 논리적, 합리적으로 판단할 때에는 분명히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부모들안에는 이성과 논리와 합리를 뛰어넘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같이 어떠한 대상이든 그 대상이 어떠냐에 따라 사랑의 유무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바라보는 위치, 신분, 상태, 특성 등에 따라 '사랑'과 '사랑이 아닌것'으로 나뉘어진다.

살인범이 사랑스럽거나 혹은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그 살인범이 이리저리 변해서가 아니다. 살인범은 살인범일 뿐이다. 오히려 변하는 것은 살인범이 아니라 그 살인범을 바라보는 '나'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살인범을 바라보는 사람 안에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랑'과 '사랑이 아님'으로 나뉘어 진다는 것이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가?

아니, 이해는 하지만 인정하지 못하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어떠한가? 과연 그렇게 썩 사랑스러운 존재일까??

그래, 주위에서 인정받으며 살아온 당신이기에 어느 정도 사랑스럽다고 하자.

그러나 과연 거룩하고 흠없으신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사랑받기에 합당한 자인가?

결코 아니다!

 

나를 바라볼 때도 그러하다.

나는 그저 추하고, 더럽고, 썩은 죄의 냄새만나는 죽어야 마땅한 죄인이다. 인생을 살아갈수록 더 크고 깊게 죄인임을 깨달아갈 뿐이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내 모습을 바라 볼 때 사랑스럽기는 커녕 실망스러울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나의 그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신다. (이것은 정말 정말 확실하고도 확실하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내가 의롭고, 깨끗하고, 거룩하고, 훌륭하고, 뛰어나고, 흠모할만하고, 사모할만하고, 사랑스러워서 사랑하시는 것인가?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사랑받을 수 없는 나를 사랑하시는가? 아니,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사랑스럽다.'라는 기준으로 따질 것 같으면 잘생긴 장동건이나 원빈, 공부잘하고 능력있는 고승덕변호사, 돈 많은 이건희 회장이 가장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평하신 사랑의 하나님은 그렇게 돈많고 잘난 사람이나 가진 것 없는 죄인인 나나 사랑하시는데 똑같이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러시나? 어떻게 이렇게 사랑하실 수 있나?

그것은 하나님은 그 자체가 사랑이시며(요일4:8), 하나님 안에는 사랑으로 충만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속성 자체가 사랑이시기에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나)들까지도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주시기 까지 사랑하신 원동력이다.

온갖 고난과 핍박 앞에서도 자신의 목숨을...십자가에 못박히면서까지 죄인들을 향해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사랑의 원동력은 그분안에 그토록 사랑하시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요, '아가페 사랑'인 것이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진짜 사랑이란 대상이 어떠하든(어떤 상태이든) 상관없이, 조건없이 사랑하는 것이라 함은 이와 같은 아가페 사랑을 말함이다.

 

 

 

 

 

 

사랑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사랑이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위와 같은 것이다.

내 안에 그 사랑이 있어야 한다.

내가 사랑하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는 어쩌면 사랑이란 모양의 흉내를 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안에 사랑이 있어야 그 사랑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사랑에대한 당신의 사고도 전환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사랑의 개념을 이제 더 확장 적용하여 발전시켜 보기 바란다.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다.(마5:44)

어떻게 하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지 알겠는가?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원리에 대해 다음번 포스트에서 나누어 보자.

출처 : 좁은 길을 걸으며...
글쓴이 : 학자의 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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