Майк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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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文化/침묵의 시간

성도의 죽음과 영생관

KBEP 2008. 12. 4. 21:51

성도의 죽음과 영생관

 

사람은 무의식중에 태어나고 의식중에 죽습니다. 무의식은 두려움을 모르나 의식은 두려움을 인식합니다. 따라서 죽는 순간보다 ‘죽음’을 생각할 때가 더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음을 촌각이라도 연장하고 싶은 심정으로 가능한 한 오래 살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김없이 죽게 마련입니다. 죽어야 할 인생임을 알면서 이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 이것이 곧 인생의 모순입니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유사이래 사람들은 이 문제로 인하여 많은 고심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정복하여 인생의 모순을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또는 오기와 만용으로 무시하거나 초월하려는 자위적 논리만 무성했을 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력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 만물과 더불어 인간은 의타적(타력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치를 명백하게 알려주는 것이 곧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죽음’을 정복하고 인생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간이 창조주를 배반한 죄인임을 시인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시어 마귀의 권세가 주장하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원한 세상이 존재함을 ‘죽음’으로 밝히고 증거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동물과 같은 존재라면 ‘죽음’의 문제는 그렇게 심각한 것으로 제기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동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지음을 받았습니다. (창 1:27) 즉 원래는 ‘죽음’이 없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으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반역한 죄로 ‘죽음’을 맛보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체험하고 다시 사는 존재(부활)입니다. 영생으로 부활한 첫 열매가 예수님의 부활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시편에 이르기를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시 116: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음’의 시점도 주관하십니다. 죽어서는 안 될 시점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살리시고 (왕하 20:6, 행 12:7) 죽어서 평안을 누릴 시점이라면 그대로 두십니다. (마 14:12, 행 7:60) ‘영생’으로 가는 ‘죽음’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며 ‘영벌’로 가는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입니이다. (요 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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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시점에서 죽을 수 있기를 위하여 항상 예비하고 기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혹여 다른 성도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나 시점에 관하여 경솔하게 추측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눅 13:1-5) 우리가 생각하는 ‘행위’나 ‘나이’등과 ‘죽음’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인 섭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인명재천입니다.

 


   “그 사람, 성직자에게 불순종하더니 어린 아들이 그런 끔찍한 죽음을 당했지 뭐야” “누구보다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그 친구가 남모르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떴을까?” 욥의 세 친구들과 같은 이런 정죄의 시각으로 보는 것은 절대 금물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이성적 잣대로 판단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만홀이 여기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성적 판단은 하나님의 섭리와 무관합니다.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욥 35:6-8)

 


   지난날 ‘일가족 생매장 강도 살인 사건’이 있었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한 동리의 복덕방에서 한 노인이 목에 힘줄을 세우면서 격앙된 목소리로 상대에게 따져 묻고 있었습니다. “아니 진짜 하나님이 있다면 말이야, 생각 좀 해봐! 그래 목사의 딸이 생매장을 당하다니, 그것도 다섯 살밖에 안된 어린것을 그렇게 무참하게 죽게 놔 둘 수 있어? 그런 하나님을 믿으라구? 이봐요!,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이야!"

 


   그는 건장하고 유식한 그리고 재력도 있는 초로의 박 씨 성을 가진 노인으로 행정부의 모 국장 자리에서 재직하다가 정년 퇴직한지 얼마 안 된 터였습니다. 그는 재직중에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꽤 치부했습니다. 그는 이 동리의 유지로서 존경을, 아니 존경이라기보다 전관예우를 받고 있습니다. 그의 명함을 보면 동회, 구청, 학교 등의 무슨 의원회 의원장 또는 위원이라는 직함이 즐비합니다.

 


   십여 년 가까이 박 노인과 이웃에 살고 있는 김 노인, 그도 공무원으로 재직했으나 하급 직원으로 별 볼일 없는 한직을 전전하다가 모아놓은 재산도 없이 퇴직했습니다. 사회적인 공인으로서, 한 가정의 남편이며 아버지인 가장으로서 박 노인과는 달리 세상적으로 무능(?)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의식적인 애국심은 아니나, 성실한 기독교인으로 오직 맡은 바 일에 거짓없이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의무와 책임을 다 하려고 힘써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나름대로 평생 기적적인 삶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자신이 현실에 맞지 않는 성격임을 알기 때문에, 그나마 공무원이 아니고 장사꾼이나 기업에 종사하는 직업인이었다면 입에 풀칠하기가 그리 쉽지는 아니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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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임수니 폭리니 또는 뇌물이니 탈세니 하면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심장이 뛰고 소름이 돋는 위인이었습니다. 불법이라면 이웃은 물론이고 자기 가족에게도 도움을 주려 하지 아니 했습니다. 그러나 김 노인은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어 주었음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불의와 죄악이 넘치는 세상에서 굶지 않고 아이들 공부시키고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왔다는 것이, 가끔 가족들의 말 못하는 불만(?)을 느낄 수는 있었으나 분수에 넘치는 복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기적에 버금가는 삶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뭣하나 뚜렷하게 잘 하는 것도 없이 그저 평범한 삶이었으나 그는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삶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날, 그는 복덕방에서 다른 노인들과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다가 그 끔찍한 사건에 말머리가 돌려지면서, 거기 모인 노인들 중 유일한 기독교인으로, 박 노인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공격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박 노인은 기독교나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라면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듯이 늘 쌍심지를 돋우는 노인이었습니다.

           

    꺼림칙한 여운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온 김 노인에게, 그날 밤 줄곧 박 노인의 말이 되살아 왔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소위 성직자의 딸이 그것도 아직 어린아이가 왜?..... 박 노인이 하나님의 존재를 진심으로 부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적으로 부정해야만 자신이 살아온 지난날의 삶이 정당화되겠기에(요 3:20) 부정하는 것인지는 모른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계신다면’이라고 전제된 그의 말속에는 ‘하나님이 계시면 그와 같은 불행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는 전지전능하실 것이라는 것을 박 노인 자신도 무의식중에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죄악에 물든 인간의 뒤틀린 속성이며 강퍅한 마음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내재(롬 1:20)되어 있기 때문에 확실하게 의식은 못하나, 무의식중에 진리를 말하게 되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종교성을 지닙니다. (전 3:11) 그러나 죄악으로 인하여 강퍅해진 마음이므로 귀로 듣거나 눈으로 본, 그리고 스스로 말한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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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한 말속에 감추어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생각하니 김 노인은 박 노인을 통해서 인간의 강퍅을 실감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 4:21,롬 9:18)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애굽의 바로 왕입니다. 갖가지 하나님의 기적을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굴복하지 못한 강퍅한 인간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여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사 6:9-10)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며 예수님께서도 그 예언을 인용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마 13:14-15) 즉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다는 예언입니다. 김 노인은 강퍅한 박 노인을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면서 그 강퍅을 돌이켜 고침을 받게 못한 자신의 무능을 자책한 것에 대하여 스스로 위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강퍅한 인간들에게, 오히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불신하게 하고 그들의 핑계와 변론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믿음장이라 부르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선진들은 좋은 부활을 얻고자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 하였다. 돌에 맞아 죽고, 톱으로 켜져 죽고, 칼날에 죽임을 당했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실한 성도들은 영생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무능한 인간으로 낙인찍히면서, 무시당하면서, 어리석게 보이면서 살고 있습니다. 언제 어느 때 죽음이 닥칠지라도 그 ‘죽음’너머에 ‘영생’이 있음을 믿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마 13:11, 롬 8:18) 그러므로 세상의 슬픔은 성도의 기쁨이 될 수 있고 세상의 두려움은 성도의 평안이 될 수 있고 세상의 고난과 환난은 성도의 위로와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필자도 가끔 내가 엉터리 신자라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성도가 죽으면 하나님이 다스라는 나라 곧 ‘천국’으로 간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명제임에도 불구하고 ‘천국’으로 가는 ‘기쁨’으로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이유가 없음에도 그 두려움과 슬픔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혈육이나 친지의 장례 때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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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술한 아이의 ‘죽음’의 시점이나 사연에 대하여 인간의 심성으로 판단하는 것은 불신자의 몫입니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의 희생이 하나님의 계획의 라인을 탔듯이 그 아이의 죽음도 하나님의 어떤 계획의 라인을 타는 것이라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육신이 죽었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주 안에서 그 영혼이 잠자는 것입니다. (막 5:39, 고전 15:20, 살전 4:14)

 


   예수님이 베들레헴의 마굿간에 태어나셨을 때 그 지경에서 그 무렵 태어났던 두 살 아래의 모든 사내아이가 헤롯의 강퍅으로 몰살당했으나 그 ‘죽음’에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비밀의 섭리가 있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적 사고방식이라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혹시 섞여 있을지도 모르는 한 어린아이(예수)를 죽이기 위하여 그 많은 아이들을 무차별 학살할 수 있는 인간의 강퍅한 잔인성을 볼 때,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죽음’이 현세의 입장에서는 순교라는 차원으로 이해하고 위로 받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세상의 고난과 환난에서 일찍 구원받아 천국으로 부름 받은 영광이요 축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이 .......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하니 .......’ (계 20:4)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어 뒤에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을 생각해 볼 때, 예수님께서도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뿐 아니라 그를 가리켜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하셨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그 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다 하셨고, 예언서에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세례 요한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세례 요한이 청년기에 헤롯에게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너무나 허무한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엄연히 이 땅에 계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를 살리시지 않으셨을까?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미 완수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미련을 가지고 더 살아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말했습니다. "그(예수)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그 영광의 길을 예수님께서 굳이 막으실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논리를 이해하기란 믿는 자라 할지라도 용이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자들에게는 어불성설입니다.

 


   불신자들의 사관(死觀)은 성도들과는 달리 사자(死者)에 대한 섬김이 살았을 때보다 더욱 극진합니다. 장례와 제사에 물심양면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믿지 않음으로 자기들의 정성 즉, 자력으로 자신들과 후손들에게 부귀영화를 줄 수 있는 영적 존재가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소위 명당자리에 유택(幽宅)을 마련한 영령(英靈)이 제물을 흠향하는 대가로 그 자손들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영력을 발휘한다고 믿는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공의인 심판에 견주어 인간사회의 정의와 선을 유린하는 독선이며 이기주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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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나의 부모’이고 ‘나의 조상’이라는 혈육관계로, 하나님을 믿었든 안 믿었든, 생존 시 인간사회에 끼친 선악간의 행위를 불문하고 사후에도 혈육의 안녕과 만사형통만을 위하여 활동하는 영적 존재라고 믿는다면 이는 인간사회를 희롱하는 망령된 생각의 소치이며 약육강식의 동물적 본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구속받지 못한 자를 짐승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계 22:15)

 


    그러나 성도들의 사관은 다릅니다. ‘죽음’이후의 영적 존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따르는 일이며 생존한 성도들과는 그 어떤 관련도 있을 수 없으며 관계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생존자의 삶이나 사자의 영을 분별하여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장례나 추도시의 예배는 불신자들과는 현저하게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천국에서는 세상의 혈육이나 친지의 관계로서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만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불신자들의 제사는 사자를 초혼(招魂)하여 인격화해서 살아 있는 사람같이 섬기기 때문에 음식도 차려 놓고 절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추도 예배는 사자의 생존 시의 신앙을 추모할 뿐이며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사자를 위한’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추도예배는 사자에게 사실상 무의미합니다. 따라서 불신자들의 사관으로 볼 때 조상을 섬길 줄 모르는 불효자들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불신자들은 사후에도 얼마든지 인격적으로 조상을 모실 수 있으므로 생존 시의 섬김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을지 모르나 성도들은 조상의 생존 시에 최선을 다하여 섬겨야 할 의무를 하나님으로부터 명령받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엡 6:1-3)

 


    여하간, 성도들과 사자와는 이미 이 세상에서의 모든 인연이 단절되기 때문에 그 어떤 영적 관계나 교제도 있을 수 없습니다. 생존 시의 혈육적 관계는 없어지고 부활 후에는 모두 변화하여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 12:25, 빌 3:21) 한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먼저 자기 부친의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실 것을 간청했으나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마 8:22) 죽은 자들의 관계는 영생이냐 영벌이냐에 따라 그 사이에는 ‘큰 구렁’이 끼어 있다고 했습니다. (눅 16:26)

 


    주위에서 믿음이 좋다고 칭찬 받는 사람들, 그리고 자타가 인정하는 직분자들 중에는 아직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적인 사관과 영생관을 정립하지 못하고 혈육적인 가족관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장례에 관한 기사는 볼 수 있으나 생일에 관한 기사는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세례 요한의 목을 벤 헤롯의 생일잔치의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살아 있을 때에, 생일이라든가 회갑연, 고희연 등의 연락을 최대한으로 즐기려하고 죽기 전에 내 힘으로, 내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업적을 성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이라고 믿는 혈육적 신앙의 기독교인들이 대부분입니다. 죄인의 생일을 축하하기 보다는 성도의 천국 입성을 축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이라면 이 땅에서의 삶이 언제, 어느 때, 어느 모양으로 ‘죽음’을 맞이하든 그 죽음 너머에 영생이 있음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능력인 믿음을 꼭 붙잡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그리스도 예수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극히 작은 자로서 천국에서는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 11:1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전 7:1-4)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