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Bulgaria
유럽 대륙의 남동쪽에 있는 발칸반도의 남동부에 있는 나라.
위치 : 유럽 동남부
면적 : 110,994㎢
인구 : 817만 2000명(2000)
인구밀도 : 73.6명/㎢(2000)
수도 : 소피아(Sofia)
정체 : 공화제
공용어 : 불가리아어
통화 : 레바(Leva)
환율 : 2.25Lv=1달러(2000.10)
1인당 국민총생산 : 2,220 달러(1998)
나라꽃 : 붉은 장미
정식명칭은 불가리아 공화국(Republic of Bulgaria)이다. 북쪽은 도나우(다뉴브)강을 국경으로 루마니아와 접하고, 동쪽은 흑해, 남쪽은 터키와 그리스, 서쪽은 유고슬라비아와 국경을 접한다.
자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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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중앙부를 발칸산맥(스타라플라니나)이 서에서 동으로 뻗어 있어 그 남과 북은 기후가 다르다. 북쪽은 도나우 강변의 저지(低地)를 향하여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남쪽은 발칸산맥과 평행으로 그보다 작고 낮은 스레드나고라산맥, 수르네나고라산맥이 뻗으면서 그 사이에 몇 개의 분지를 이루고 있다. 이 두 산맥은 풍부한 삼림지대를 이룬다. 국토의 남동부는 북(北)트라키아 평야로 풍요한 농업지대, 남서부에는 삼림으로 덮인 로도페·피린·릴라의 세 산맥이 있다. 릴라산맥의 무살라산(2,925m)은 발칸반도의 최고봉이다.
강은 대개 짧은데 북쪽으로 흐르는 이스쿠르강(江)과 안드라강은 도나우강과 합쳐져 흑해로 흘러가고, 남쪽으로 흐르는 마리차강과 툰자강, 아르다강은 에게해(海)로 유입된다. 기후는 바다가 가까운데도 대륙성기후이며 4계절이 있다. 북부에서는 겨울이 길면서 춥고 강설량(降雪量)이 많으며, 여름은 덥고 건조하다. 남부의 겨울은 온화하고 여름은 매우 덥다. 기온은 연평균 10.5@이고 강수량은 일부 고지대를 제외하고는 전지역에 걸쳐 평균 530∼685㎜이다. 국토의 38%는 산림, 14%는 초원이며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석탄·석유·철·망간·납·아연 등이 다량으로 매장되었다.
주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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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의 주민은 슬라브 계통의 불가리아인(人)이 전체의 약 85%를 차지하며 그밖의 소수민족 중에서 가장 많은 민족은 터키인으로 약 10%를 차지한다. 터키인은 1950년과 1951년의 2년 사이에 15만 명이나 국외로 이주하여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의 이동을 나타냈다. 다음이 5%를 차지하는 20만 명 가량의 집시족이고, 그외는 아르메니아인·러시아인·루마니아인의 순이나 그 수는 많지 않다. 수도 소피아에 120만 명이 거주하며 그밖의 주요도시로는 플로브디프·루세·바르나·부르가스 등이 있다.
불가리아인은 언어와 민속이 똑같은 단일민족이며 종교적으로는 대다수인 83.5%가 그리스정교(正敎)이고, 일부가 이슬람교(13%)·가톨릭(1.5%)·프로테스탄트·유대교 등을 믿는다(1998). 공용어는 슬라브어 중 남슬라브어계에 속하는 불가리아어(語)이며 러시아어·영어·프랑스어·독일어·터키어도 사용한다. 문자는 러시아어와 거의 같은 문자를 쓴다. 2001년 인구는 798만 명으로, 출생률 저하 및 해외이주로 인하여 1992년에 비해 51만 명이 감소하였다. 2000년 인구증가율은 -1.16%이고 출생률도 1,000명당 8.06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에 속하며, 사망률은 14.63명, 영아사망률은 15.13명이다. 평균수명은 70.91세로 남자는 67.45세, 여자는 74.56세이다. 인구의 69%가 도시에 밀집하여 있다.
불가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 후진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탈바꿈하려 하였다. 그러나 출발점이 저개발이었으므로 아직 농공업국의 탈을 벗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경제가 발달하였다고는 하나 소비물자가 충분하지 못하며, 여러 선진 공산국가와 마찬가지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사회보장제도에 따른 병가·출산·은퇴 수당을 지급받으며, 진료혜택을 어디서나 쉽게 받을 수 있다. 불가리아의 교육은 생산과 직결되어 있다. 1959년에 성립된 신교육법에서는 종합기술교육 방침이 채용되고, 1964년부터 초등 8년, 중등 4년의 신학제가 실시되고 있는데, 1981년부터 초등 8년은 의무교육제이다. 교육은 각급 학교에서 무상으로 실시된다. 고등교육은 교사 양성을 위한 2·3년과정과 4년제 대학교 학위를 주는 2가지 형태로 이루어진다. 각 분야의 고등전문학교가 있으며 학술기관으로는 과학아카데미·농업과학아카데미가 있다. 신문은 민주세력동맹의 기관지인 ≪데모크라티아≫ 등이 있으며, 국영 BTA 통신과 소피아 프레스 등도 있다. 1999년 현재 15세 이상 문맹률은 2%이다.
불가리아의 문학은 9세기 무렵 모라비아에서 추방된 키릴과 메토디오스 제자들에 의한 성자전(聖子傳)·우화(寓話) 등이 있다. 또 보고밀파(派)에 의한 대중문학 《아담과 이브에 관한 이야기》 등 주로 종교적인 작품에서 시작되었다. 14세기 말 투르크의 지배하에 들어간 다음에는 문학도 정체되었으나 국민의 정신생활은 우화·서사시·전설 등으로 표출되었다.
18세기 말에는 신부 파이시가 《슬라브 불가리아사(史)》를 저술하여 민족의식을 제고시켰고, 19세기 전반에 이르자 해외에서 출판이 행하여졌으며 종교서·학술서가 중심이었다. 1850년대 이후 투르크 지배에서 벗어날 때까지 문학은 혁명운동의 수단이 되었고 H.보테프, D.슬라베이코프 등의 시인을 배출하였다.
그후 이반 바조프는 문예부흥의 전통에서 수많은 시와 장편소설 《멍에 Pod igoto》(1893)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1876년 4월 반(反)투르크 봉기를 그린 명작으로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불가리아 문학의 수준을 높였다. 19세기 말에는 개인주의파의 시인 슬라베이코프, 상징주의파 P.야보로프 등의 시인이 나와 시의 형식면에서 크게 공헌하였다. 그후 흐리스토 스마르넨스키는 사회의 변혁을 정확히 파악한 뛰어난 작품을 발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작가 중에는 역사소설 《철(鐵)의 등대(燈臺)》를 쓴 D.탈레프, 노동소설 《담배》를 쓴 D.디모프, 전후 최대의 걸작이라고 일컫는 《복숭아 도둑》의 작가 스타네프 등이 유명하며, 이후 수많은 재능 있는 신예작가들이 출현하였다.
연극은 투르크의 지배가 끝나고 시작되었으며, 고대 민속극을 기초로 삼았다. 20세기부터 소피아에서 상설(常設) 연극이 공연되었으며 점차 자국의 작품이 상연되었다. 19세기의 극작가로는 보이니코프와 희극 《유형자(流刑者)》를 쓴 바조프 등이 있으며 20세기부터는 야보로프, 요르단 요프코프 등이 인기가 있었다. 전후부터 소련의 작품을 비롯하여 세계의 레퍼토리가 상연되고 있으며 최근의 극작가로는 바실리예프·시다로프가 눈에 띈다.
불가리아는 문화재가 별로 많지 않다. 7∼9세기 건축의 특징은 바실리카 양식이며, 센트럴 양식은 흔하지 않으나 9∼11세기에는 이 양식을 모두 볼 수 있다. 12∼14세기 건축은 비잔틴의 영향을 받았으며 회화(繪畵)도 마찬가지로 비잔틴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인 예가 바티코보 수도원과 보야나 성당의 벽화이다.
19세기의 화가로는 미토프, 앙게로프 등이 유명하다. 불가리아의 민속공예는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자수와 목각이 유명하다. 민요는 옛날부터 전해지고 있으나 그밖의 음악이 발달한 것은 투르크의 지배가 끝날 무렵부터이며 특히 러시아와 체코의 영향을 받았다.
가장 오래된 작곡가는 19세기 후반의 마노로프, 옛 세대의 뛰어난 작곡가는 프리스토프이며 이 세대는 민족음악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최초의 오페라 작곡가는 아타나소프이며, 20세기의 지도적 역할을 한 작곡가는 블라지게로프, 현대 작곡가로는 스토야노프, 피프코프, 쿠테프, 하지예프 등이 있다. 1904년에 창립된 소피아 국립음악원이 음악교육의 중심을 이룬다.
영화에 선구적 역할을 한 사람은 제1차 세계대전 전 투르크와의 싸움을 테마로 영화를 만든 V.겐도프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극영화 외에 다큐멘터리·과학·만화·인형극 등의 영화가 제작되면서 영화 수준도 높아졌다. 유명감독으로는 B.보라자노프, Z.잔도프, D.다코프스키 등이 있다. 전통적으로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 레슬링, 배구, 농구 등이며 다뉴브강(江)과 흑해에서 요트와 낚시 등도 많이 즐긴다.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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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 불가리아 지역에 살던 인종은 주로 트라키아인(人)이었다. 그후 BC 15년부터는 로마의 주변 영역이 되었으며, AD 6·7세기경에는 북쪽에서 온 슬라브인이 발칸반도 전체를 점유하였으나 7세기 후반에, 원래 볼가강(江) 유역에 살고 있던 투르크계(系) 불가리아인이 침입하여 슬라브 불가리아 국가인 제1불가리아제국(681~1018)을 이룩하였다. 이 제국은 오랫동안 비잔틴제국(帝國)과 전쟁을 계속하였으나, 반면 양국간에는 문화의 교류도 행하여져 865년 보리스 1세 공 때는 비잔틴형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이 시대는 또 봉건적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때였으며, 시메온 제왕(893~927) 시대에 제국(帝國)은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투르크 타타르계의 주민과 원주민인 슬라브인의 혼혈이 행하여졌으며 10세기가 되자 반(反) 봉건운동인 보고밀운동이 광범하게 일어났다. 1018~1185년까지는 비잔틴제국에 굴복하였으나 1185년 북부 도시 투르노보를 중심으로 한 봉기(蜂起)에서 제2불가리아제국(1186~1396)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봉건체제의 붕괴로 인하여 1393년부터는 투르크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투르크는 불가리아의 귀족을 살해하고 이 지방의 지배를 확립하였다. 이리하여 불가리아의 발전을 지연시킨 500년간의 암흑시대가 시작되었다.
16세기에 오스만투르크 세력의 약화와 함께 몇 차례나 민족독립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1876년 불가리아 민족해방의 싸움이 격화되어 다시 심한 탄압을 받았으며, 이 때문에 시작된 러시아·투르크 전쟁(1877~1878)의 결과 불가리아는 투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1885년에는 세르비아와 싸워 이겼으며, 이 무렵부터 자본주의적 관계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1912년에는 투르크에 대항하는 발칸동맹이 성립되고 불가리아는 대(對) 투르크전(제1차 발칸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독일·오스트리아 편으로 돌았기 때문에 이듬해 제2차 발칸전쟁에서는 제1차 때의 동맹군과 투르크군을 상대로 싸워 패전함으로써 많은 영토를 잃었다.
1914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투르크 쪽에 서서 세르비아·그리스 공격을 위한 독일군의 진주(進駐)를 허가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한 뒤 농민당·공산당·군부 등 사이에 정권투쟁이 계속되다가 1930년대에 들어서자 파쇼국가와 접근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의 압력으로 추축국측에 가담하였다가 전세의 불리를 깨닫고 1944년 8월 영세중립국을 선언하였다. 1944년 9월 소련이 불가리아에 선전포고하고 영내로 침입하여 파시즘 정권은 쓰러지고 공산 정권이 개혁에 착수하였다.
1946년 3월 토지개혁, 9월 8일 왕제(王制) 폐지에 이어, 9월 15일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0월 G.디미트로프가 총리로 선출되고 1947년 12월 공산당식 헌법이 채택되었다. 이후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체제가 계속되었으나, 1989년 11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전국적인 시위가 있은 후 1당독재를 포기하였다. 1990년 11월 국명이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에서 불가리아 공화국으로 변경되었으며, 1992년 10월 최초의 민선대통령으로 젤류 젤레프가 취임하였다.
정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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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의 국가 최고권력기관은 의회(GNA)로 단원제이다. 대의원 수는 240명으로 임기는 4년이며, 20001년 말 현재 각 정당별 의석수 분포는 전 국왕인 시메온 색스코부르크-고타(Simeon Saxe-Coburg-Gotha)를 지지하는 '시메온 2세 국민운동연합(SNM)'이 120석, 민주연합(UDF)과 국민연합(PU)의 연합체인 민주세력동맹(UDF)이 51석, 구(舊) 공산세력 중심의 좌파정당인 불가리아사회당(BSP)이 48석, 회교계 정당인 '자유와 권리운동동맹(MRF)'이 21석이다. 최고행정기관은 각료회의이며, 회의의장은 총리이다. 상당히 제한적인 권력을 가지는 대통령은 직선제로 선출되며, 임기는 5년이고 중임이 가능하다.
사법부는 최고재판위원회가 있으며, 최고파기법원, 최고행정법원, 헌법재판소가 있다. 1990년 4월 대통령제를 신설하였으며, 1991년 7월에는 의회민주주의의 채택, 대통령직선제를 골격으로 하는 동유럽 국가 최초의 민주적 헌법이 새로 채택되었다. 1990년 10월 민주세력동맹에 대한 지지율이 사회당의 지지율을 웃돌고 사회·정치적 불안이 가중됨에 따라 루카노프 총리가 퇴진하였으며, 12월 포포프 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전후(戰後) 최초의 연립내각이 출범하였다.
이후 1991년 10월 총선에서 민주세력동맹이 승리하여 디미트로프를 총리로 하는 민주정부를 수립하였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젤류 젤레프가 2차 결선투표로 당선되었다. 이후 정치·경제민주화를 추구한 디미트로프 내각은 의회에서 불신임을 당해 1992년 12월 권리와 자유당이 지명한 베로프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1995년 출범한 불가리아사회당의 비데노브 내각은 1996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후 사임하였으며, 1996년 대통령선거에서 피터 스토야노프가 선출되었으며 이반 코스토프가 1997년에 총리에 취임하였다. 1997년 1월에는 민주세력동맹의 페타르 스토야노프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1년 6월 총선에서 압승한 '시메온 2세 국민운동연합'과 '자유와 권리운동동맹'이 연립내각을 수립하였고 7월에는 전 국왕인 시메온 색스코부르크-고타가 총리에 취임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산당 후신인 사회당(BSP)의 게오르기 파르바노프가 당선되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경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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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불가리아는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뒤떨어진 나라였다. 1939년에는 후진적 농업이 총소득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임업과 합쳐 80% 가량의 노동인구가 여기에 종사하였다. 당시 공업의 3/4 이상이 경공업이며, 주로 섬유·담배·식품공업으로 중공업과의 비율은 4:1이었고, 산업의 기간 부문은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외국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농업후진국에서 공업국으로의 전환을 꾀하여 농공업국이 되고, 1957년에는 공업생산과 농업생산의 비율이 7:3이 되었다.
전후(戰後)에는 공업부문이 급속히 발달하였으나 광업도 주요산업으로 꼽히고 있어 석탄·석유·철·망간·납·아연 등이 중점적으로 개발되었다. 전력(電力)은 90%가 화력발전이며, 에너지 자원이 빈약하기 때문에 가스·원유·석탄을 수입한다. 새로운 공업으로는 기계·화학(비료·황산 등)·경전기(輕電機)가 있으며 경공업은 면직을 중심으로 모직·견직 등의 섬유공업과 식품공업이 있다. 설탕·통조림·식물유·포도주 등의 식품공업이 활발하였으나 러시아· 동유럽시장 붕괴 및 농업 침체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농업은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감소하고 있으나 지금도 경제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다. 경작면적의 3/4을 차지하는 곡물류가 중심을 이루고 그밖에 채소·과일 등도 중요하며 장미유(薔薇油)생산은 연산 약 1,000kg으로 세계 제일이다. 2000년까지 국영 토지의 99.13%가 민간에 환원되었다. 이스쿠르강(江)·툰자강의 발전소는 관개용수는 물론 경지의 확대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 어업 외에 축산에서는 전통적인 양돈이 유명하며, 관광업도 성장 가능한 산업으로 중시되고 있다. 1989년 민주화와 시장경제제도 도입 이후 농·공업부문의 생산 비중이 감소된 반면 서비스 부문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1999년 현재 국내총생산 가운데 농·임업이 17.3%, 공업이 26.8%, 서비스업이 55.9%를 각각 차지하였다.
불가리아의 경제개혁은 동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늦게 착수되었고 공산권 시장의 붕괴, 높은 외채비율, 중요 교역국인 이란·이라크·리비아 등에 대한 서방의 경제제재로 여러 가지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 외화소득의 40% 이상을 채무상환에 충당하였으나 1989년에는 상환에 어려움이 많아 지불유예 조치를 선언하였다. 1987년부터 루세·부르가스 등에 자유무역지대를 설치하여 외국의 투자를 유치하려 하였으나 1990년대 초반까지는 불안정한 경제개혁으로 외국인 직접투자 규모가 매우 적었다. 이후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2000년에는 약 11억 달러(국내총생산의 9%)의 외국인 직접투자가 이루어졌다.
1997년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1998년부터 경제성장률이 플러스로 바뀌면서 소비증가, 소득증대, 고용확대가 계속되었고 2000년에는 국내정치 및 경제가 안정됨에 따라 경제성장률이 5%로 높아졌다. 무역면에서는 수출이 47억 달러, 수입이 58달러이며, 주요 수출국은 이탈리아·독일·그리스·터키·러시아, 수입국은 러시아·독일·이탈리아·그리스·프랑스 등이다.
대한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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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는 북한과 우방관계를 유지하여왔으나, 한국과는 1980년대 후반부터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하여 소련의 개방·개혁 추진에 따른 불가리아의 대(對) 한국관계 개선 의지와 한국의 북방정책으로 급속히 관계개선이 진전되었다.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며, 북한은 1948년, 한국은 1990년 3월 23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88년 11월 대한무역진흥공사와 불가리아상공회의소는 상호무역사무소 개설에 합의하였으며, 1989년 4월에는 소피아, 7월에는 서울에 양국 무역사무소가 설치되었다. 1990년 경제과학기술협력협정, 1994년 문화협정, 1995년 항공협정·이중과세방지협정, 1996년 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
1991년 5월 외무장관 볼코프와 재무장관 코스토프가 방한하였다. 1992년 9월에는 소피아에서 ‘한국문화의 날’ 행사가 열려 음악·미술·무용·영화전시회가 거행되었으며, 11월에는 불가리아 체임버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이 있었다. 1999년 현재 대한(對韓) 수출 1950만 달러, 대한 수입 1100만 달러이며 수출품목은 가성소다, 화학원료, 인조필라멘트, 담배, 알루미늄 제품 등이며 수입품목은 자동차, 어류, 전자제품, 기계제품 등이다. 한국인 교민 112명이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CIA World Fact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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